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 (문단 편집) ==== [[상업]] ====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 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 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또 공명은 이를 이용하여 무기를 개량하였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무기와 단단한 철갑은 촉나라의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공명의 북벌시에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와 대치만 할 뿐 감히 대적하지 않았으며, 촉한의 험준한 지형상 군수 물자 수송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공명이 군사를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암염을 개발했다. 촉은 원래부터 정염(井鹽)과 철광자원이 풍부했는데, 정염은 정확히 말하면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 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 물자였으므로,[* 한 왕조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연의에서나 정사 등애전에서나 촉한 정벌 이후 관련 계획에서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 여담인데 조미료마저도 사천 지방은 주목할 만했던 듯하다. 향신료 중 사천산이 '촉강'/'천화초'라 불리우며 특별 대접을 받을 만큼 질과 생산량 면에서 독보적이었던 까닭이다. 다만 촉한의 신하였던 [[맹달]]은 당시 사천 고기요리의 특징을 [[꿀]]/[[엿]]을 많이 쓰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를 생각하면 과거의 사천요리는 좀 더 달았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더불어 공명은 촉금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고 본래 유명하던 촉한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금관이란 기관을 만들어 민영/관영 할 것 없이 직간접적인 관리를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 삼았다. 당시 촉금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위진 이래 촉금이 생겨나서 양읍의 자리를 빼앗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양읍은 견직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변하여 결국 얇은 채색 비단은 촉지방에만 있게 되었다. >주개검의 〈사수필기 絲繡筆記〉 >삼국 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촉나라 비단' 무늬의 참신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뭇 신하에게 "전후로 매번 촉나라 비단을 얻었으나, 서로 비슷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예문류취 藝文類聚〉 권85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 >〈능개재만록 能改齋漫綠〉 권15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 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차]][* 제갈공명이 입촉 후 운남성의 차를 갖고 [[보이차]]를 만들어 보급하였단 전설이 내려오고 실제로 차의 재배가 촉한 지역의 주요 산업이었다.] 와 농지로 유명하다. 남중 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