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 (문단 편집) ==== [[화폐]] ==== >일찍이 [[유장]]을 공격할 때 유비가 여러 장수와 군사들에게 약속했었다. "만약에 성도(成都)가 평정되면 부고(府庫)에 있는 모든 물건은 나는 관계치 않겠다."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수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이는 쉬운 일입니다. 다만 마땅히 '''직백전'''을 주조케 해, 여러 물가를 평정하고, 관리들에게 영을 내려 관시를 하게 하십시오."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 [[http://rexhistoria.net/index.php?_filter=search&mid=history_sam&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9C%A0%ED%8C%8C%EC%A0%84&document_srl=7460|출처: 파성넷]]] [[남제서]]에 따르면 오수직백전은 [[커튼]] [[고리]]를 징발하여 만들었다.[* "나라를 위해 쓰고자 장막을 거는 고리(帳鉤)를 취해 그 동으로 돈을 만들었다.(劉備取帳鉤銅鑄錢以充國用。) [[http://rexhistoria.net/community_translators/176540|출처: 파성넷]]] 사서에서 촉한이 [[동전]]을 따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기도 하고, 또 한가군 엄도와 월수군 공도에서 [[구리]]가 나기는 했으나, [[유송]] 때도 구리가 나긴 났으나 없어서 철전을 찍었던 것을 보면 이는 사실로 추정된다. 직백오수전은 소전[* 小錢, 동탁이 오수전을 녹여서 새로 만들었던 동전인데, 크기도 작고 불순물도 많이 섞인 데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조숭]]이 [[환관]]에게 '''1억''' 닢을 바쳐서 [[태위]]를 산 것에서 가늠할 수 있다.]이나 [[오수전]]보다 큰 실물 가치를 지녀서 겉보기에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삼성]]이 얘기했듯 직백(直百)이라는 것은 '''액면 가치가 오수전의 무려 100배인 것이다.''' 오수전이 2.6 g이었고, 직백오수전은 7.9 ~ 9.5 g이었으니,[* [[http://dspdaily.com/news/view.php?no=1071|#]]] 고작 3배의 주조 비용이 증가했다 한들, [[주조 차익]]이 100배나 늘어나면 그 화폐는 사실상 헐값을 넘어 '''똥값'''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계산하면, 직백오수전은 크기도 작았으며 불순물도 섞였던 동탁의 동전보다 그 가치가 1/10 이하였던 일이다.] 촉한은 이런 식으로 민간 경제를 [[약탈]]하였으며, [[한중 공방전]]과 [[형주 공방전]] 등에 사용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카키누마 요헤이, 『촉한의 선군 정치와 경제 시스템(蜀漢的先軍經濟體系)』, 2011.] 관아의 창고가 가득찼다고 서술된 것은, 촉한의 화폐와 화폐 경제가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해 [[주조 차익]]을 거둔 일과 흡사하다. 물론 군사력 위주의 정치와 경제를 지녔던 것은 당시 삼국이 동일했다. 위에서 촉한이 민간에서 자원을 끌어와 형주와 한중에서 전쟁을 치른 것을 지적했는데, 조위의 경우는 촉한과 동오 뿐 아니라 북쪽과 서쪽의 이민족들 역시 견제해야했다. [[위(삼국시대)]] 문서에 나와있다시피 조위는 국경 전체가 사실상의 전선이었고, 이에 따른 군서적 소모는 방어에 특화되어있던 촉한보다 훨씬 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적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고 민심이 안 좋았던 조위 지역과 달리[* 한중공방전과 형주공방전 당시 유비 측 세력에 호응해 위나라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등.], 파촉 지방 내에서 반란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남만 등 이민족 지역에서도 제갈량의 남정 이후 반란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의 사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제갈량의 제사를 지낼 정도로 당대의 민심은 촉한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즉 민간경제를 약탈해 전쟁을 지속한 것은 '''3국이 전부 해당되었으므로''' 지도부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가 높은 것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촉한은 상대적으로 저들보다 약탈의 정도가 덜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촉한이건 조위건 전쟁을 지속했고, 후대의 기준에서 봤을 때 민중이 살기 힘들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촉한에서 화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위 저서를 쓴 카키누마 쇼헤이는 제갈량이 인민에게 가혹했는데도 왜 칭송을 받는지에 대한 결론 부분에서 "제갈량을 찬양하는 것은 사마의의 군사적 공로를 과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제갈량 등의 찬사는 촉한 멸망 후 뿌리를 내린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제갈량이 사망했을 당시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유선이 거부했으며, 이후 촉한의 백성들은 물론 주변의 이민족들까지 자발적으로 제사를 지었다는 것이 '''정사에 명확히 나와있다.''' 즉 제갈량은 후대에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당대에 자발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즉, "촉한이 민간 경제를 수탈했으며 제갈량에 한 찬사는 촉한 멸망에 뿌리를 내린 것"이란 것은 후대 사학자 중 한명인 카키누마의 개인적인 해석이지 팩트가 아니며, 특히 제갈량에 대한 평가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위 저서에서는 '민중을 약탈한 정치가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리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삼국 모두 전쟁을 치르느라 백성들을 수탈했다면 그 중 덜 수탈하는 정치가가 백성들에게 상대적으로 나은 평가를 받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 문단에서도 '촉한이 삼국 중 수탈이 덜했다'는게 팩트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1)전쟁을 치르느라 민간으로부터 많은 자원을 징발한 것은 3국 공통이었다 2)촉한의 지도부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존경을 받았다, 부분까지 팩트란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던 난세에 대한 배경 이해 없이 저 서술만 들으면 마치 촉한의 지도부만 백성들에게 가혹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 전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전쟁을 계속하는 국가라면 당연히 민간의 자원을 끌어다 쓸 수 밖에 없으며, 3국은 이 점에서 모두 자유롭지 않다. 위나라의 경우 촉한, 오나라와의 갈등 외에 고구려와 2차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오나라는 합비를 둘러싸고 위나라와 수십년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사실 오나라의 경우 화폐 제도 개혁이 더 처참하게 실패해(쌀 44곡 3두의 값이 '동전으로 따지면 8억전'이라고 쓰여있는 오나라의 목간이 발견되기도 했다) 악화였던 촉한의 태평백전이 일부 유통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며, 위나라에서는 오수전의 발행에도 불구하고 현물거래 위주였다. 즉 한나라 때 확립된 화폐경제가 동탁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 이후 삼국시대에는 어느 국가에서도 완벽히 복구되진 못했다. 정사에 발행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 사실 직백오수전도 정사에 남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료(역사)|사료]]가 발견되었으므로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직백오수전은 직백전으로 계속해서 주조되었는데, 후기에 만들은 태평백전은 제조 품질도 좋지 못하고 무게가 '''3.3 ~ 6 g'''으로 줄어들었으며, [[서진]] 때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으나 파촉에서 발견된 정평일백은 무려 '''0.5 g'''에 불과했다. >촉한이 망했을 때 금은 얼마였는가? 금, 은 각각 이천 근이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 금자 2천 근과 은자 4천 근의 하사에도 문제가 없었다. 망국 때 촉한의 경제는 참혹했고, 함부로 돈을 날린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금과 은이 귀한 가운데 비단, 견사가 각각 20만 필이나 있을 만큼, '''촉한은 화폐 경제보다 물물 교환하는 원시 자연 경제로 돌아갔다.''' 왜 촉한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촉한의 화폐는 적폐와 주수[* 注水, 물먹다.]된 지 오래였다. 매년 막대한 군비 지출로 인해서 새로 주조되는 직백오수(直百五銖), 태평백전(太平百錢), 정평백전(定平一百) 등은 화폐의 무게가 많이 줄었고, 심지어 태평백전은 화폐가 너무 작아서 부득이하게 금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새로 주조된 돈은 많아져 군사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일시적인 계책이었다. 돈의 가치가 떨어져 촉한은 경제 체제가 붕괴된 데다, 후기 통치자가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서 촉한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https://baike.baidu.com/item/%E8%9C%80%E6%B1%89%E5%85%B4%E8%A1%B0%E4%BA%94%E5%8D%81%E5%B9%B4/53181917?fr=aladdin|#]]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은 망하기 좀 전에, 창고의 식량이 40여만 곡, 금은이 각기 2천 근, 비단인 금, 기, 채, 견이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걸핏 보기엔 많아 보이나, 유비가 입촉하고 나서 하사한 양과 대조하면 금은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촉한은 인두세 납입과 오에 바치는 조공이 갈수록 [[특산물]]인 [[비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 중세사』] 납입 수단이 화폐에서 [[견]], [[면]], [[직물]]로 바뀌는 것은 위와 오에서도 나타난 일이다. [[고옹]]의 후손 고훤(顧烜)은 촉한의 돈이 삼오[* 三吳, 오군(吳郡), 오흥(吳興), 회계(會稽)로 오나라를 3개 지역으로 나눈 지역들을 뜻한다.]의 여러 현에서 유통되었다고 하였으며, 오나라도 [[236년]] 500닢, [[238년]] 1천 닢, [[240년대]]에는 2천 닢과 5천 닢의 액면가를 가진 동전을 발행한 적이 있다.[*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246년]]에 동전 제조를 중단하고 액면가 높은 화폐를 무효로 정하였다.] 서진도 똑같으며, [[수서]] 식화지에 따르면 [[양(육조)|양]]나라까지 촉한의 화폐를 사용하였다. 유비의 직백전 채용은 삼국, [[위진남북조]] 때, 그리고 나아가 [[중국]] 수천 년 [[위폐]] 주조와 유통의 첫 시작이었다. [[http://dspdaily.com/news/view.php?no=1071|#]] 화폐 제도가 제대로 작동한 것은 [[당나라]] 때인 [[621년]]에 만들어진 [[개원통보]]부터이다.[* 발터 샤이델, 『The monetary systems of the Han and Roman empir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