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갑석 (문단 편집) == 생애 == 1929년 3월 10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 180번지에서 7남매 중 막내로 [[https://m.blog.naver.com/steelgun/40148866198|태어났다]]. [[1947년]]에 [[조선경비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사병으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뒤에 [[1950년]]에 [[현지임관]]으로[* 여기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으나 [[6.25 전쟁]]에도 참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지임관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소위가 되었다. [[중령]]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근무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포병대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1955년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11기(최초의 4년제 학사 졸업자 출신 기수)들이 그보다 먼저 1973년에 [[준장]]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1978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8기동사단|제8보병사단]]장을 역임하고 [[제2작전사령부|제2군사령부]] [[부사령관]][* 그의 회고록을 보면 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을 때 당시 [[차규헌]](육사 8기. 하나회 후원자. 1929~2011) 2군 사령관이 깍듯하게 영접하였다 한다.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는 인상적인 환영사도 했다 한다. 본인 역시 2군 사령관이 최종 보직이었다.]을 마지막으로 1983년 10월 31일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재무 담당관 보직의 상사로서 [[제6보병사단]]에서 복무하다가 소위로 현지임관하며 포병으로 전과 했다. [[한국전쟁]]시 포병 전문가로써 군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때 [[송요찬]] 장군이 1만발을 밤새 쏘라고 하자 요란하게 쏜 뒤 적당히 기록지를 가라로 만들어 보고해 칭찬을 받은 일화도 있다.[* 사실 탄약은 CSR(통제보급율)을 고려하지 않고 사격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할 양이 없거나 부족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육군포병연대장으로써 야전에서 근무하던 도중 대간첩작전을 수행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인사참모로 지내면서 파병 군인들의 복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와 인사 업무를 수행했다. 소령 시절 제6군단 포병대대장을 맡다가 28사단에 배속되어 당시 사단장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s-2|서정철]] 장군을 지프에 태우고 포병 훈련장을 돈 적이 있었는데, 서 장군은 보조석에서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자고는 사단 참모회의때 운전 잘한다고 대놓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는 운전면허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운전병이 없으면 운전을 못하는 지휘관도 허다했다.] 중령, 대령시절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인사참모부의 중견 실무자로 근무하다가 당시 5.16 군부 세력의 진급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현지임관]] 출신으로서 실전경험과 근무실적까지 흠잡을데가 없는 이력을 갖고도, 군사정권이 비육사 출신을 홀대했고 또 유능하면서도 시대에 맞지 않게 아첨을 안하는 최갑석 장군의 강직한 성향을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항상 진급에서 육사출신들에게 밀렸다고 한다. 육군 항공감[* 당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부탁해서 맡았다고 한다.]으로써 육군항공에 큰 기여를 했으며 포병과 같은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비전투병과인 인사, 경리, 감찰, 군수 등 여러 방면에 있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원칙과 소신을 지킨 군인이라 평가 받는다.[* 실상은 윗선에서 흠잡을데 없이 전투임무에 능하고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병 출신 비주류를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일찍 전역시키려고 해본 적이 없거나 못할 것 같은 여러 보직에 돌린 것에 가깝다. 근데도 그걸 모조리 잘 해내고 진급했으니 군인으로선 엄청난 먼치킨인거다.] 군 복무 시절 최장기 근속 보유자, 최다 계급 진출자, 전 신분을 거친 최다 신분 경력자, 보병, 포병, 경리, 감찰, 항공 등 최다 병과 근무자, 28개 부대를 전속 복무한 최다 부대 전속자, 여순사건에서 베트남전 참전까지 최다 전역(戰域) 참가자, 최다 아이디어 창안연구 보고자 등 '살아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 이자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서 '장군이 된 이등병'이 있으며 [[제12보병사단]] 예하 포병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갑석 대대'가 있다. 또한 여느 군인이나 공무원과는 달리 예전엔 관행화되어있던 [[군납비리]]까지 철저하게 멀리할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준수한 인물이었다. 준장으로 진급하고[* 진급한 그 날 모친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수기에는 진급 12일 후 모친상을 당했다고 써있다.] 받은 2차 보직이(1차 보직은 육군본부 인사근무처장) 야전부대 지휘관이나 참모가 아니라 육군의 비전투 군납을 관리하는 장인 원호관리단장[* 現 [[국군복지단]]의 전신이다. 과거에는 군별로 복지단이 있었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PX를 점검[* PX 술이 담긴 통을 열었더니 헌 농구화 짝이 나오고, 살이 벗겨진 죽은 쥐가 나왔다 한다. 그리고 미군이 쓰다 버린 드럼통에 술을 운반하는 것을 알게 된 최 장군은 분노했다고 전해진다.]하고 군납품 생산지 현황을 점검하자[*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더러운 변소 옆에서 풀빵을 굽고 있었다고 한다.] 아주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결국 물품 하나하나의 규격과 청결도를 본인이 직접 지정하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원호관리단장은 소장 진급에 실패한 준장이 끝물에서 상인들과 적당히 어울리면서 한 재산 해먹고 전역하는 한직인데 최갑석 장군은 이 원호관리 임무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운영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야전지휘관인 8사단장을 맡았다. 당시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 그를 칭찬하였다.] 사단장 임기를 마친 후에는 보통 사실상 소장전역대기자가 지내는 한직인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내고 예편하였다.[* 당시 2군사령관은 아래에 나오는 차규헌이다. 12.12의 그 차규헌 맞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의 육군사관학교 시절 4학년때 교장이 차규헌이고 박지만의 첫 소위 근무지가 8사단이고 당시 8사단장이 최갑석이란 점을 보면 이미 차규헌이 최갑석을 잘 봐둔 것으로 보인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편했고, 2년 정도 같이 일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고 인상적인 환영의 말을 했다고 한다.] 예편 후에는 전 2군사령관이었던 [[차규헌]] 교통부장관의 배려로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 상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최갑석 장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감찰을 담당하고 군 내부에서도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던 자신을 예편 이후에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고. 당시 기업들과 공조직에서는 횡령, 배임, 뇌물수수가 관례로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2~4대 이사장을 역임한다. 이사장 재임 당시 고속버스 예매 시스템의 전산화와 고속버스 터미널 시설의 개수 및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예편이후 2016년 11월 8일 그는 향년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