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규하 (문단 편집) === [[10.26 사건]]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최규하 취임식 사진.png|width=100%]]}}} || || 대통령 취임 선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J_KPNj4j-g, width=100%)]}}} || || 대한뉴스의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보도[* 불과 6일 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5bC6nqOzDk0, width=100%)]}}} || || 대한뉴스의 1979년 12월 21일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보도 ||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때 [[민주공화당]]에서는 [[김종필]]의 대통령 출마를 준비했으나, 김종필 본인이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다만 최규하가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5년의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 10일 특별담화를 열어, '대통령 궐위 시 3개월 이내 후임자를 선출한다'는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실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러 다음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5.17 이전까지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더라도 전두환이 부장 서리[* 현직 군인 신분이라 정식 부장직을 맡을 수는 없었기에 눈가리고 아웅 한 것]로 직접 입안한 중앙정보부 개편에서 최규하의 지시로 차장 직이 2개로 유지되는 등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전두환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5.17이 필요했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증거이다. 하지만 최규하를 이어 국무총리직을 맡은 [[신현확]]은 80년 초반의 상황에서 최규하가 신군부를 등에 엎고 권좌에 남아있으려는 욕심을 은근슬쩍 내비쳤다고 증언했다. 첫째 증거로는 신현확이 배석자도 없이 독대해서 [[10.26 사건|김재규로 인해]] 쑥밭이 된 [[중앙정보부]]를 수습하고 전두환의 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민간인 부장을 임명하라고 요청했는데, '대통령은 군인을 중정 부장에 임명하려고 하는데 총리가 민간인을 요구해서 늦어진다'라는 기사가 뜬금없이 [[타임(주간지)|해외 언론]]에 나왔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신군부에 영합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규하측이 직접 흘린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는 것. 둘째로는 4월 24일 기자들과의 총리 공관에서의 만찬에서 신현확은 자신을 비난하는 거리의 시위대의 비판[* 이는 3월 14일에 뜬금없이 최규하가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이원화를 의미하는 이원집정제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인해 촉발되었으며, 당시에는 정보 통제 등으로 인해 신현확이 이 뒤에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상황을 종합해보면 그는 일관되게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했고, 이는 최규하의 대통령직 유지 술책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현확이 이때 신군부 세력의 대부처럼 여겨졌다는 것은 5월 8일에 열린 서울대학교 학내 모의 재판에서 신현확에게 사형,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재판장을 맡은 사람이 [[윤석열]]이다.]에 대응하여'우리 과도기의 관리 정부는 사명을 다하고 물러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다음날 득달같이 청와대 사람이 달려와서 우리가 무슨 뜻이냐고 캐물었다고 한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사망하는 바람에 정말로 흑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기의 최규하의 굼뜬 행동에 대해서는 다수의 동시대인들이 비판했다. [[김영삼]]은 [[4.19 혁명]] 이후 [[허정 내각|허정 과도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정치 일정을 단축해서 3개월 내에 선거를 실시했다면 [[5.17 내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여전히 확신하고 있으며, 실제로 당시에 그렇게 요구했고 대답도 받았지만 뭉개버렸다고 2000년대에 나온 회고록에 썼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고건]] 또한 정치일정 가속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신현확]]은 최규하가 제대로 일을 했다면 민정 이양이 제대로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심지어 입장이 정 반대인 [[노태우]]도 "최규하는 능력도 없이 시간만 끌었다", "정치 일정을 길게 잡는 바람에 혼란을 가중시켰다"라고 비판했다. 결국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하나회|신군부 세력]]이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최규하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중동에 순방을 나갔던 최규하는 [[서울역 회군|거센 민주화 시위]]에 5월16일 급히 귀국했으나 신군부측 군인들에게 포위된 국무회의장에서 5.17 내란의 단초가 되는 비상계엄전국확대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었고, 이후 허수하비로 전락하고 나서는 5월 25일 민주화운동이 진행 중이던 광주에서 '냉정과 이성을 되찾고,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신현확은 5월 17일 당일 아침에 대통령 - 총리 동시 사퇴 선언으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자고 제안했으나 최규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P6FqFXmu9A)]}}} || || 사임하는 최규하 || >1980년 8월 16일 오전 10시 최규하 대통령은,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특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책임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10.26 사건|불행했던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또한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기 위하야 애국충정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 자신의 거취에 관한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나는 오늘 대통령의 직에서 물러나 >헌법의 규정에 의거한 [[박충훈|대통령 권한대행권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있어서는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헌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박충훈|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에게 >대립과 분열이 아닌 이해와 화합으로 대동단결하고 >불퇴전[* 한번 도달한 수행의 지위에서 물러서지 아니함]의 의지와 용기로 부강한 민주 국가를 건설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입각한 평화통일의 기반을 >착실히 구축해 나가도록 간곡히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 >약 10개월간 국가원수의 직무를 담당해온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s-5]]가 [[전두환|후임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됐습니다 >최 대통령의 이번 사임은 >[[신군부|새 지도 세력]]에게 [[대한민국 제5공화국|새 역사]]를 이끌어갈 >책임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사임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인 8월 18일 오전에 >최규하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 >[[서울]] [[서교동(서울)|서교동]]의 사저로 이사했습니다. >---- >'''대한뉴스 제 1295호 - 최규하 대통령 사임''' 결국 1980년 8월 16일 사임함으로써 역대 최단임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공군]]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참모총장]]을 지낸 [[김정렬(1917)|김정렬]] 장군이 오랜 친구로서 설득했다고 한다. 훗날 김정렬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로 발탁된다.] 그 직후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한 번 더 열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 바로 헌법을 바꿔서 제5공화국의 유일무이한 대통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