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규하 (문단 편집) === 사임 이후 === 사임 후 [[1981년]] 4월부터 1988년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내고 1991년부터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현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2대 의장을 지내다가, 1993년부터 [[윤택중]] 전 문교부장관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로 연금을 받았으나, 평소 유교 정신을 실천하는 검소한 성품이었기에 서교동 사저에 30년 이상 거주했으며 일본에서 산 선풍기를 수십 년 동안 사용했다. 1989년 5공특위로부터 국회증언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고, [[문민정부]] 때인 1994년 9월 및 1995년 12월에 서울지검으로부터 참고인 조사 요청을 받은 데 이어 1996년에도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게 되자 서울지법으로부터 증인 소환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하여 이기창 변호사가 "전직 대통령이 국정행위에 대해 증언이나 해명을 하면 후임 대통령들이 책임있는 국정수행을 못한다"고 [[https://news.joins.com/article/3292039|그 사유를 대신 말해줬다.]] 이 때문에 당시 풍자의 대상이 되거나 신문만평에서는 입에 자물쇠가 채워졌다거나, 김영삼이 최규하 대포를 쏘려는데 총포구가 꼬여서 발사가 안 되는 것처럼 최규하의 침묵을 표현한 만평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규하 전 대통령 노년.jpg|width=100%]]}}} || || {{{#ffc224 '''말년의 모습'''}}}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최규하프로필.png|width=100%]]}}} || || {{{#ffc224 '''최규하 대통령 공식 영정'''}}} || 말년에는 요통 등 지병을 앓으면서 2005년 8월에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한 달 동안 [[http://news.kbs.co.kr/news/view.do?ncd=781265|병상에 누웠고]],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에 사망했다. 향년 87세. 사망 당일 병원 측은 그의 사인이 급성 심부전증으로 추측된다고 밝혔으며, 10월 26일엔 장례는 [[국민장]] 형식으로 서울 [[경복궁]] 흥례문[* 영결식 이후 3년 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 역시 이곳에서 치러졌다.]에서 치러져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영결식 이후 현재까지도 대전현충원에는 역대 대통령 중 최규하 전 대통령만이 유일하게 안장되었다.] 그의 유품 중 1천여점은 2009년 [[원주시청]]이 인수해 원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기증했고, 이외 유품 653건 /1,822점은 2013년에 유족들이 서울시청에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086486603036880&mediaCodeNo=257&OutLnkChk=Y|기증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임 당시 신군부에 관련된 일을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갔다. 1995년 소환 시도 당시에 회고록이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최홍순 비서관은 이를 부인하며 외교관료 때부터 많이 썼던 메모는 있다고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7406|밝혔다.]] 2006년 사망 당일 YTN 취재 결과 조문왔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망록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134394|언급했으며,]] 측근들의 말로는 생전에 이를 토대로 회고록을 내려 했으나 본인의 뜻이 왜곡될까봐 주위의 만류로 포기했고, 일부는 서교동 자택 지하에 보존돼 있었으나 1980년대 당시 폭우로 지하실에 물이 들이치면서 젖어버리는 바람에 쓸모없게 된 데다 유언장이 없어 가족회의를 통해 공개될 수 있지만, 결국 이런저런 뒷말을 남긴 채 공개는 안 됐으며 2013년 유족이 유품들을 서울시에 기증했을 때도 문제의 비망록은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말이 있는데 연금과 공직생활 중 모은 돈, 그리고 본인 내외의 생활습관으로 봤을때, 검소하게 살았던 모습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원도 지역사회에선 2012년에 그의 청백리 정신 등을 기리기 위해 '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가 창립됐으나, 생전 기록을 남기지 않은 행보 등이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되어 [[http://m.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78427.html#cb|사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