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명길(조선) (문단 편집) == 가족관계 ==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은 [[성혼]]의 제자였으며 1585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태학에 입학했다. 1600년 왕자의 사부로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을 가르친 바 있었다. 1602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균관 전적, 형조, 예조, 병조 정랑을 거치고 1612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영흥부사가 되었다가 인목대비 폐출 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가평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 아들의 출세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기남의 외조부는 남상질(南尙質)이었으며 조선의 첫 번째 양명학자라고 할 수 있는 남언경(南彦經)의 집안이었다. 최명길의 첫 번째 부인은 인동 장씨로 장만의 딸이었다.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어, 장자 최후량(崔後亮, 1616 ~ 1693)을 입양했다. 장씨 사후 재취하여 양천 허씨를 아내로 맞았다. 그 사이에서 최후상(崔後尙, 1631 ~ 1680)을 얻었다. 그럼에도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변함없이 장자로 여기며 관계를 유지했고 가산도 상속시켰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했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 박세당의 묘비명의 일부.] 최후량 또한 부친에게 변치 않고 효도했으며 동생인 최후상과도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최후량 묘지명>의 일부. '아우 응교(應敎) 후상(後尙)과 우애가 몹시 돈독하여 전택(田宅)과 동복(僮僕)을 나눌 적에 반드시 좋은 전택과 동복을 골라 주었다. 서매(庶妹)에게도 넉넉하게 자급해 주고는, “선공의 혈육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그들로 하여금 궁핍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응교군이 그 아내에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오직 형님만이 나의 지기이다.”라고 했으며, 또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야말로 진짜 대인(大人)이다.”라고 했다.'] 장자 최후량은 아우 최혜길의 차남이었다. 3세에 친모인 이씨가 사망했고, 9세에 백부인 최명길의 양자로 들어갔다. 최명길, 최혜길에게 배운 것 외에도 [[장유(조선)|장유]]와 [[이경석]]에게도 배웠다. 21세이던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양부인 최명길, 생부인 최혜길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강화도에 들어갔다. 강화도 함락 이후 가족들과 지인을 보호하고 청나라 군영으로 찾아가 최명길의 아들임을 밝히며[* '내가 들으니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와 이조판서 최명길 두 집안을 찾아내어 침범하지 말라는 칸의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러한가? 내가 바로 최명길 상서(尙書)의 아들이다.'] 가족의 안위를 지켰다.[* 태종 홍타이지가 최명길의 가족이 있다면 보호해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때 청군은 바로 믿지 않고, 영의정을 역임했었으며 당시 좌의정 김상용과 함께 종묘 신주를 모시는 제조로 강화도에 있었던 윤방에게 최후량을 데려가 확인했다.] 청군도 가족들을 안전하게 한양으로 보내주었다. 이런 일이 있어 당시 사람들이 태종 홍타이지와 최명길이 내통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 사실도 있었다. 호란 이후 최후량은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8년간 하게 되었다. 1642년 양부인 최명길도 심양에 잡혀왔는데 최후량이 이때 청나라의 관리를 세 차례나 찾아가 여진말로 최명길을 적극 변호하여 청나라에서는 최명길에 대한 처우를 경감했다. 또한 당시 몸이 좋지 않은 최명길을 수발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양부의 정적이었던 김상헌과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1645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하자, 소현세자를 포함한 모든 포로들이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고 최후량도 최명길과 함께 귀국했다. 1651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공조좌랑 및 배천군수, 영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정사공신인 최명길의 원훈이라 하여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1681년 청풍 부사가 되었다. 1685년 70세에 아들들의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한성부 좌윤이 되었으나 고령으로 사직했다. 문집으로 《정수재집》(靜修齋集)을 남겼다. 호란 당시나 볼모 생활 당시의 일화를 보면 기개가 있고, 최명길도 그의 식견을 높이 사며 정무 상의를 했던 등 빼어난 능력이 있었으나 과거 시기를 놓치며 입신양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유전자는 어디 안가고 아들인 정승 형제 [[최석정]]과 [[최석항]]에게 이어졌다. [[남구만]]이 묘갈명을 지었고,[[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H&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6A_0210_010_0050|링크]][* 묘갈을 청할 당시 최석정은 영의정, 최석항은 이조판서, 최창대는 광주부윤이었다.] [[박세당]]이 묘지명을 지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G&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98A_0090_010_0140|링크]] 최석정의 아들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관료이자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창대였다. 최명길의 친자였던 최후상은 1654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664년 문과에 급제했다. 현종 시기 지평, 정언, 교리, 수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응교 등 청직을 역임했으나, 최명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래저래 말이 많아 관운이 좋지 않았다. 실록에서도 허적과 정태화 등이 현종에게 이야기한 바도 있다.[[https://sillok.history.go.kr/id/krb_10506103_003|링크]] 훗날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친자가 없어 최후량의 차남인 최석정이 입양되어 뒤를 이었다. 최후상의 묘지(墓誌)가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다. 큰 형 최래길(崔來吉, 1583~1649),[* 최명길 급제 다음 해인 1606년 생원시, 1611년 문과 급제] 바로 아래 아우인 최혜길(崔惠吉, 1591~1662)[* 1613년 진사시, 1625년 문과 급제]도 문과 급제자였으며 함께 인조반정에 참여했다. 최래길은 3등 공신이었으며, 최혜길은 한 집안에 공신이 너무 많이 나올 수 없다고 하여 제외되었다. 두 사람 모두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했고 이후 최래길은 공조판서까지 올랐으며, 최혜길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최혜길은 최명길과 최후량 부자가 심양에 인질로 있었을 때 동지사로 심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최명길의 조카로서 최래길의 아들인 최후윤(崔後胤, 1611 ~ ?)은 1644년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문학을 지냈으며, 최혜길의 장남은 최후정(崔後定)이었고, 차남은 최후량, 3남은 진사 최후원(崔後遠, 1627 ~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