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명길(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키가 작고 인물이 볼품없었던 데다가 몸이 약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외모를 셀프[[디스]]하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으며 40세 전후에 이미 [[치아]]가 10개 넘게 빠져서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스승인 신흠의 글을 보면 "내 [[사위]]를 삼고 싶으나 후사를 남길 수 있을지 걱정된다"라는 대목이 있다.][* 심지어 [[장모]]인 임씨조차도 사위가 키가 작고 병약한 것을 문제삼았고 이후에도 사위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다만 장인인 장만은 "최서방의 겉모습은 비록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자손들이 사위 덕을 보게 될 일이 많을 것"이라고 늘 두둔했다고 한다.] 집안 사람들도 그를 무서워해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영민해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聖德)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治道)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고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즉, 자신이야말로 큰 일과 작은 일 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멀티플레어를 가진 인물이라는 말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김류의 그럼 큰 의논도 잘 내고 큰 식견도 가진건 자신이라고 생각하냐는 생각을 통해 이를 드러냈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상당히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고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단 1번에 모두 통과한 천재였지만 정작 최명길의 문집인 《지천유사》를 보면 의외로 엉뚱하고 4차원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을 보고 "네 [[말(동물)|말]]의 귀는 왜 그리 기냐?"라고 물었는데 조카가 어이가 없었는지 크게 웃으면서 "이거 말이 아니라 당나귀예요."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 호조판서 시절에는 관청에서 기와 500장을 주문했는데 "500장은 너무 많으니까 '한 우리'를 줄 것"이라고 결재를 냈다. 헌데 문제는 여기서 '한 우리'는 '기와 2,000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최명길은 '한 우리'를 '기와 100장'으로 착각하고 결재를 잘못해서 망신을 당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이 [[도량형]]도 제대로 알지 못해 결재를 엉뚱하게 하고, 개쪽을 당한 격이다.] * [[명나라]]에서 [[송나라]]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유행했던 [[왕양명]]의 [[양명학]][* 양명학은 성리학과 반대되는 이론이었으며, 성리학과는 비교가 안되어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는 당대 조선에서는 송나라에서 만든 주자의 성리학을 비판하거나 이론을 부정한다면 '''사문난적'''(邪文亂敵)으로 몰려버렸다. 다만 이전에 문서에는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을 공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양명학은 퇴계 [[이황]] 이래로 성리학이 주류를 잡은 조선에서 거의 [[이단]] 취급을 받았고,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왕씨(왕양명)의 심즉리에도 논리가 있다"며 양명학을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수한 인물이 정제두였고, 이후 정제두가 거주했던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강화 학파가 생겨났지만 한국 사상사에서는 비주류였다. 다만 비주류라고는 해도 [[한국사]]에 적지 않은 흐름을 남겼는데 강화 학파의 명맥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이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이기도 했던 위당 [[정인보]]였다.] 시기는 불분명하나 젊은 시절 장유와 함께 주자서 외에도 육왕서를 함께 공부했다.[* 장유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우리들이 전에 베낀 육왕의 글을 열람하여 평소에 좋아하던 여러 편을 크게 낭독하여 보다가, 형과 같이 침상을 같이 하며 함께 공부하던 옛 일이 갑절이나 생각났습니다.'][* 1611년 이전으로 추정. 1603년 장유와 함께 이항복의 문하에 함께 있었는데, 침상을 같이 하며 공부했던 때일 가능성이 높다.] 최명길의 연보에도 24세에 ‘아버지의 외가쪽 친척인 동강 남언경(東岡 南彦經)의 아들 남격(南格)에게서 계곡 장유와 함께 양명학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남언경은 서경덕의 문인이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 중 한 명이다. 부친 최기남의 외가가 남씨 집안이다.] 아마도 독자적으로 익히고 남격에게도 더 배웠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50세 때인 1635년 장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왕학이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깨달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손자인 최창대는 ‘지천이 어려서 육왕학을 공부했지만 중년에 이르러 양명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초년의 견해를 수정하였다'는 기록도 남긴 바 있다.[* 참고: 한정길, <조선조 관료 지식인의 양명학관연구(3)-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의 양명학관을 중심으로>] 최명길은 저서로 《사문록》(思問錄)을 남겼는데 주자의 유학 경전 주석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의 견해를 수록했다. 이 중 <맹자기의>(孟子記疑)는 최명길이 묻고, 조익이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문록》은 훗날 주자학과 반하는 언사를 입에 올렸던 [[박세당]]이나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본 후손들이 외부로 유출하지 않았고, 문중에서 필사본으로만 전해내려 갔다고 한다. * 군사 방면으로도 관심을 가졌는데 역적 [[이괄]]을 토벌한 무신 [[정충신]]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였으며[* [[정충신]]은 스승이었던 백사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에 반대하여 유배를 갔을 때 함께 귀양살이를 하면서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기록을 남겼다. 이 때 정충신이 저술한 책이 《백사북천일록》이었다.] 정충신이 이괄을 토벌하고 관직 생활을 할 당시, 한직에 붙잡혀서 서인들의 감시를 받는 최명길과 비슷한 입장에 섰다. 정충신은 대표적인 주화파 무신이었으며 최명길과의 군사 대담을 실은 《만운집》(萬雲集)은 당시 주화파들의 입장에서 조선군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역사)|사료]]이다. 두 사람은 각각 '문충공'과 '충무공'으로서 문신과 무신으로서 제각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를 받았다. * 최명길은 《주역》에 매우 능해서 [[인조반정]]의 거사일을 직접 점을 쳐서 정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와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주역》을 공부하는데 매우 힘썼다고 한다.[* 한명기, 《최명길 평전》, 도서출판 보리, 2019] * [[야사(역사)|야사]]에는 최명길이 젊은 시절에 험난한 산길을 가야했는데 하룻밤 묵은 곳에서 어느 여자 원혼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최명길이 그녀를 도와 한풀이를 하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때 그녀는 고마워하며 앞으로 최명길이 높은 벼슬을 할 것이고, 청나라가 쳐들어와 어려운 고생을 할 것이라는 미래를 예언했다고 한다. 해당 이야기는 1980년대 <[[전설의 고향]]>에서 다룬 바 있다. * 많은 사안에 관해 딱딱하고 감성이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청음 김상헌]]이 자살 미수를 벌이는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생쑈'''라고 의심했다든지[* 하지만 위의 야사에 등장하는 [[북경]]의 감옥에서 나눈 시의 일화 등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화해했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감동적인 사건이다. 실제로 현대에는 김상헌이 척화파라 까이기도 하지만, [[남한산성]]에서 [[정축하성|출성 항복]]을 거부한 이유가 "성을 나가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걸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출성 항복을 한다는 건 '내 나라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청나라는 수백 년 동안 대립해온 [[여진족]]인데다가 당초 [[정묘호란]] 때 '명나라와 단교를 안하고 형제 관계 맺읍시다.'라고 한 후금이 대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너네 우리 신하 하라능" 하니, 김상헌의 눈으로는 "수백 년간 우리와 대립해오고 형제 하자더니, 이제는 신하를 하라 하고, 출성 항복으로 나라가 망하기도 했는데 어떻게 저들을 믿고 항복하는가?"였을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답이 없는 척화파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논거를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나라에 충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짜 척화 정신이 강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김상헌은 입만 산 사람은 아니라서 일흔 넘은 나이에 청나라로 끌려갔는데도 자기 할 말은 다 했다. 이에 오목도라는 용골대랑 같이 있던 청나라 관리가 조선 사람은 다들 우물쭈물거리는데 이 사람은 대답이 매우 명쾌하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인조의 부친 추숭 행위를 두고 그깟 왕위 따위 아무나 받으면 된다고 [[선비]]들의 불만을 무시했다든지,[* 종법상으로야 어긋난 면이 있지만 어쨌든 생부는 정원군이다보니 그런 듯하다.] [[이괄]]이 역모에 연루되자 [[이귀]]만큼 추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여 바로 현실 대책부터 논의했던 점을 보면 최명길은 현실주의자 특유의 각박한 심리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환향녀 문제와[* 이건 대단한 건데 사대부들은 자기들 탓임에도 불구하고 환향녀들이 정조를 잃었다면서 무시해, 심지어 1500금으로 아들을 속환시킨 이성구라는 사람은 "옛날에도 역적의 딸과 이혼시킨 적이 있는데, 이들은 몸을 더럽혔으니 이혼시켜 주소서."라고 했다. 사실 문제는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도 없이 막연하게 추측만으로 한 이야기인 데다가 사대부 전체가 환향녀에 대해 무시를 한 집단이라 이들을 옹호하는건 용기가 상당히 필요한 일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사관들로부터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며 거하게 까였는데 사실 사대부들, 적어도 벼슬하는 사람들도 이 논리대로라면 신하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죽어야 했다.] 기득권 철폐[* 물론 궁방전 문제는 다른 이들도 제기했고, 그 이후로도 제기한 사람이 많았다.] 등에서 보여준 약자 보호의 마음까지 본다면 최명길은 '패도'와 '정의'의 양립을 추구했던 인물[* 사실 현대 시각에서야 왕도와 패도의 양립을 추구하는게 실용적으로 보여서 뭐가 나쁘냐고 할 수 있지만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의 시각에서 패도는 전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뒷날 [[윤증]]과 [[송시열]]의 [[회니시비]] 중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도와 패도를 같이 행하니 경전의 가르침과 안 맞는다'고 송시열을 디스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최명길이라는 인물이 비록 본질은 유학자였어도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당대에 드물었던 진정한 의미의 현실주의자였다. * 위에서 나오듯이 옥중에서 김상헌과 화해했다고 하는데, 주고받은 필담이 유명하다. 다음은 최명길의 필담 중 일부이다.[* 이 부분의 앞은 개요 부분에 나와 있다. 김상헌의 답구는 [[김상헌(조선)]] 항목으로.]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진정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나니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이나 삼베옷이나 옷 아닌 것 없네.''' >[[유도리|일이 때에 따라 다를망정]] >[[애국|마음]]이야 어찌 정도를 벗어날까? >'''[[김상헌(조선)|그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청주)|북이면]] 대율리에 최명길의 묘가 있다. 손자 [[최석정]], 증손자 최창대의 묘도 함께 있다. 그리고 아들 최후량과 최후상, 손자 [[최석항]]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과 그 옆의 [[평내동]]에 위치한다.[* 사실 같은 산에 있는데 선을 그어 만든 행정구역이다보니 동이 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