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명길(조선) (문단 편집) === 병자호란(1636. 12~1637. 1) ===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청나라]]로 개칭하고, 홍타이지 한이 [[황제]]를 칭하면서 조선과의 외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조선 내부에서도 국왕부터 관료,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오랑캐와 한 번 붙어보자는 척화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도 최명길이 유일하게 >"[[압록강]]이 얼면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신은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묘호란 당시 함께 강화를 주도했던 이귀와 강홍립은 둘 다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상소를 받고 인조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청나라 군대는 이미 군사를 출동할 채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파 신하들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고 갖은 욕을 먹었으나 그의 말대로 [[병자호란|병자년(인조 14년) 겨울]] 청나라는 12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입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던 인조는 현실을 깨닫고는 "최명길은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삼학사|젖비린내나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강력하게 최명길을 옹호했다.] 빠른 기동 작전으로 청나라군이 [[불광동]]까지 몰려온 상황에서 최명길은 "자신이 저들의 요구 사항을 물어보겠다"고 사신을 자청해 청나라군을 찾아가 시간을 끌어서 그 덕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할 시간을 벌었다. 그 후 [[남한산성]]이 청나라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와 "계속 전쟁을 하느냐?"를 놓고 [[김상헌(조선)|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파 대신들과 극렬하게 대립했다.[* 김상헌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 세력이 지지 세력을 늘리기 위해 끌어들인 재야의 서인인 '청서'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현실주의적인 면이 강하던 공서와 달리 이들은 명분 중심적이었으며 그랬기에 비현실적인 척화의 의견을 강하게 견지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남한산성에는 전략 물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지리멸렬하여 [[쌍령 전투|맥없이 무너졌으며]] 그나마 정예군이었던 북방군은 군 통수권을 쥐고 있었던 도원수 [[김자점]]이 눈치만 보고 전혀 움직이지 않아 유명무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명길은 [[사대부]]의 욕을 정말 세차게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며 청나라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급한 상황에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딴지를 계속 걸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팩트폭력|"잘났으면 니들이 청나라군 물리쳐보든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일단 당시 상황이 조선군으로 막아낼순 없는 상황인지라 남한산성 내 조선군에서 척화신을 내보내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정작 조정은 이걸 또 어떻게 강경 진압이나 해산을 시킬 수 없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최명길 말대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었다.] 관료들이 "항서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 고 주장하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그대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그대은 신(臣)이라는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되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내 책임이지 그대들 알 바가 아니란 말이오, 아시겠소이까?" 라고 일갈([[https://sillok.history.go.kr/id/kpa_11501018_002|인조 15년 1월 18일 기사]])하기도 했다. 척화파들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인조의 국서에 스스로를 '臣'이라 일컫는 부분 등 항복 형식과 관련되어 열을 내는 사이 최명길은 최악의 상황에서 모든 오명과 비방을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협상을 조금이라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오랑캐]]라 지칭하는 청나라 황제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더라도 최대한 비극적인 면모를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했다. 최종적으로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김상헌은 "오랑캐에 항복하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자살을 시도했는데 최명길은 쌓인게 많았는지 "가족들이 다 보는데서 하면 죽을 수나 있겠느냐''면서 진실성을 크게 의심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최명길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상헌은 대들보에 목을 매면서 가족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다가 숨이 끊어지면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다. 공조참의이자 관량사였던 [[나만갑]]이 김상헌한테 왔다가 방 안에서 김상헌이 목을 매달고 밖에서 가족들이 곡만 하고 있는 꼴을 보자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살려냈다. 이를 볼 때 자살 시도는 진짜였던 것 같다.] 최명길의 주화론은 대명의리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호란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명의리를 위해 조선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사직과 백성이 대명의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할 수 있었다. 최명길은 《[[예기]]》를 해석한 후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여 사직을 보존하도록 설득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 《예기》, <곡례>(曲禮) 下의 '국왕은 사직을 위해 죽는다'(國君死社稷)라는 말을 국왕이 반드시 죽어야 할 경우는 사직이 망할 때이므로, 나라가 망하지 않을 방법이 있으면 임금이 죽음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해석했다. 또한 인조가 종사와 나라를 위하여 항복하고 백성을 위해 욕됨을 참았기 때문에 항복했지만 항복한 것이 아니고, 욕되었지만 욕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 참고: 이남옥, <지천 최명길의 사상적 배경과 주화론>][* 또한 국왕인 인조가 ‘필부(匹夫)의 절개’에 ‘집착'(膠守)했다면 ‘반드시 종사는 망하고 모든 생령은 사라졌을’이라면서, ‘생민’을 위해 치욕을 감수한 것은 ‘지극히 어진 행동이고, 크나큰 용기'(至仁大勇)였다고 인조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