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민호 (문단 편집) === 공직 생활 === 외대 졸업 후인 [[1980년]],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주로 내무부(現 [[행정안전부]])에서 근무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1985년]] [[사무관]]으로 입직해 지방자치제기획단, 지방기획국에서 근무했고, [[서기관]]으로 승진해 [[1995년]] [[충청남도청]]으로 전입, 당시 관선 [[군수]]급인 기획담당관과 지역경제국장을 역임했다. [[1997년]], 요직인 본부 지방자치기획단 제도과장으로 부임했으나,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지방행정, 치안 등을 담당하는 [[내무부]]와 정부 인사, 서무 등을 담당하던 [[총무처]]가 통합되어 순식간에 자리를 잃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무부 지방기획국이 지방자치를 말살하는 부서라며 국 내 모든 공무원을 대기발령시켰고, 당시엔 6개월 이상 대기발령 상태면 면직되었기에 최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일 [[구파발역]]에서 [[양재역]]까지 [[서울 지하철 3호선|3호선]]을 타고 왔다갔다하다가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공무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반론하는 책인 『공무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저서를 냈다. 다행히도 얼마 안 가서 IMF 대책 TF로 무보직 발령받아 복직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장 직위를 얻어 다시 완전히 정착했고, 동년 9월 충청남도청 정책관리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2000년]]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안면도국제꽃박람회 조직위원회 사무처 본부장, [[2002년]]엔 충청남도청 기획정보실장을 역임했고, [[2003년]]에 본부로 복귀해 [[행정자치부]] 지방분권추진기획단장과 공보관(대변인)[* 이 때 [[이사관]]으로 승진했다.]을 지내다가 [[2006년]], 민선 4기 [[이완구]] [[충청남도지사]] 하에서 [[충청남도 행정부지사]](1급)를 지내게 된다. 이로 인해 친이완구계로 구분되며, 이 때의 인연으로 국무총리비서실장까지 맡게 된다[* 임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달 남짓한 기간이며 이완구가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에 연루되면서 70일만에 사퇴하자 따라서 사퇴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행안부로 복귀하여 지방공무원의 인사를 총괄하고 정부 인사 정책을 총괄하는 인사실장[* [[인사혁신처]]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2009년]]엔 차관급으로 승진해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직을 지내게 된다. [[2011년]]에는 충청권 인사인 점을 고려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에 부임했다. 이 시절에 행복도시 내 지명을 순우리말로 짓는 아이디어를 내어 실현시켰다.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으로 발생하는 [[세종특별자치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동년 10월 청장직을 사퇴하며 31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