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사위 (문단 편집) === 최사위 묘지명 === [[문종(고려)|문종]] 때 최사위의 막내아들 최영언이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묘지명이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다. 고려사엔 없는 최사위의 가계가 기록되있고 여섯 아들과 사위의 이름과 관직을 알수 있다. 각각 * 1남 어사중승(御史中丞) [[최충공]](崔忠恭) * 2남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충경(崔忠敬) * 3남 사재승(司宰丞) 최준검(崔遵儉) * 4남 내사서령(内史書令) 최충약(崔忠諾) * 5남 상서호부낭중(尙書戶部郎中) 최충영(崔忠永) * 6남 시합문지후(試閤門祇侯) 최영언(崔令言) * 사위 상서이부낭중(尙書吏部郎中) 김경화(金敬和) 최사위는 건축 및 토목에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그가 참여한 건축물은 * 현화사(玄化寺) - 현화사비와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 [[봉은사]](奉恩寺) * [[태묘]](太廟) * [[보제사]](普濟寺) 금당(金堂), 나한전(羅漢殿) * 의왕사(醫王寺) * 사가원(寺家院) * [[서경(고려)|서경]](西京) 사천삼사(四天三寺) * 서경(西京) [[장락궁]](長樂宮) * 서경(西京) [[태조(고려)|태조]]진전(太祖眞殿) * 연주(延州) 진북영화사(鎭北靈化寺) * 선주(宣州) 신중사(神衆寺) * 진도현(珍㠀縣) 점찰원(占察院) * 시진현(市津縣) 포천(布川) 미륵원(彌勒院) * 낭천군(狼川郡) 개통사(開通寺) * 계성사(啓星寺) * 개차근산(皆次斤山) 정양사(正陽寺) * 수주(水州) 자복사(資福寺) * 송림현(松林縣) 보현관(普賢舘) 가 있다. 내용을 보면 보제사, 봉은사, 현화사, 태묘, 장락궁, 태조진전 등 유명한 건물도 눈에 띈다. 묘지명에 기록된 최사위의 마지막 관직은 다음과 같다 * 직위: 태사(太師) - 내사령(內史令) * [[산계#후삼국시대|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 [[시호]]: 정숙공(貞肅公) 직위와 시호는 고려사와 똑같지만 향직 품계가 추가되어 있다. 최사위의 현종 옹립 시기의 일화, 여요전쟁 때의 일화가 실려있다. [[현종(고려)|방금성고(方今聖考)]][* 방금은 지금이란 뜻이다. 성고는 임금의 아버지를 의미하는데, 이 묘지명이 만들어졌을 때가 [[문종(고려)|문종]] 때다. 문종의 아버지는 [[현종(고려)|현종]]이므로 '지금 임금의 아버지'는 현종이다.]께서 [[잠룡]](潜龍) 시절 [[고려의 궁원|대량원(大良院)]][* 현종은 대량원에 봉해져 대량원군이 되었다.]에 머물고 있을 때, [[천추태후|여후(呂后)]][* [[천추태후]]를 한나라의 [[고황후 여씨|여후]]로 비유하여 비난한 것이다.]가 [[김치양]]과 성고를 죽이려하자 이를 막고 대보(大寶)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여요전쟁 시기, 거란국(契丹國)이 병마를 끌고와 [[강조(고려)|배주신좌(背主臣佐)]][* 주인을 배신한 신하, 즉 [[강조(고려)|강조]]를 의미한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사위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일축했다. 거란군이 돌아가던 중, 그들을 습격해 크게 격파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