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영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include(틀:영상 정렬, url=MfxgiT-KbRg)] [include(틀:영상 정렬, url=_SNLMKYg6Dk)] [[매관매직]]이 성행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벼슬 자리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몰라서 묻나? 상공(商工)을 배우면 간단하네!"라고 독설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최영 본인은 우왕 당시 [[권문세족]]의 대표였던 [[이인임]]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이인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애당초 최영의 가문인 동주([[철원군|철원]]) 최씨가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조준(조선)|조준]], [[민제]] 등도 [[권문세족]] 출신이다. 사실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권문세족]] 문서 참조. 다만 교과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최영을 '''신흥 무인 세력'''으로 분류한다. [[신진사대부]] 문서에도 알 수 있듯이 기존 세력이 신진 세력에 합류하는건 매우 평범한 일이다. 최영이 권문세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신흥 무인 세력'''이라 칭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실제로 정치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최영이 [[이인임]]의 편에 서서 활동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공민왕]] 사후에 혼란했던 정치판에서의 모습을 보면 이인임과의 정치적 파트너로써의 모습도 강하다. 예를 들어 [[이인임]]이 역모 사건의 처벌로 우왕의 유모 장씨를 죽이려 하자, 이를 알게된 우왕이 "장씨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며 살려달라며 매달렸으나 최영마저 거절했고, 이에 우왕에게 "그대는 누구의 신하인가!"라는 일갈을 듣기도 했다. 물론 최영, [[이인임]]이 공민왕 밑에서 함께 출세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전우애가 생길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사실 [[이인임]]은 오늘날에는 [[권문세족]]의 대표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집안은 철원 최씨에 비견할 정도로 세도가 강한 일족이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철원 최씨에 대면 성주 이씨는 그냥 유력 호족 집안 출신이다. 의외겠지만 권문세족 목록에도 없다.] 오히려 조부대에 명신을 배출하며 늦되게 출세한 집안으로, 최영과 권문세족으로 교류가 있었으리란 추측은 큰 근거가 없다. "둘 다 권문세족이라 친했나?"라는 말은 후대에 보기에 왜 최영 같은 충신이 이인임 같은 권신이자 간신과 성격도 다른데 뜻을 같이 했는지 워낙 이해가 안 되고 아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따라붙은 말에 가깝다.[* 심지어 최영, 이인임이 공민왕과 뜻을 함께 하는 바람에 원래 권문세족 집안이던 자신의 가문엔 해만 되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고려가 [[총체적 난국]]이었던 [[공민왕]] 시절에 크게 중용되었다는 점이다. 현재는 다소 축소된 면이 있지만, [[홍건적의 난|홍건적]]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의 수백 차례의 침공에다가 내부적으로도 [[흥왕사의 변|국왕 시해 시도]]로 인해 공민왕 시절의 고려는 그야말로 막장급 최고 난이도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어떤 왕이 즉위했어도 그것보다 잘해내긴 어려웠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전 왕들과 이후 왕들의 실력만 봐도 알 만하다. 그 시절 외침을 막느라 죽어난 게 최영이고, 내부에서 감정 기복 심한 왕과 신하들 사이의 중재며 개혁 정치와 외교까지 한꺼번에 도운게 [[이인임]]이다. 우왕 대에 막장을 달린 것과 달리 공민왕 시절의 이인임은 아직 [[타락]]하기 전이었고, 실제로 왕과 다른 신료들의 입에서 [[충신]] 소리가 나올 만큼 제대로 일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대에 일했던 신하들은 [[우왕]] 대까지 대부분 뜻이 잘 맞아떨어졌다. 애초에 최영과 같이 홍건적 2차 침입 때 경성 수복 [[공신]]이 된 신하 중 상당수가 공신이라 더 잘 죽었다. [[공민왕]]은 의심이 들면 그 즉시 신하를 [[숙청]]하기를 반복했는데, 특히 최영도 포함되어 있던 흥왕공신들을 수두룩하게 숙청하였다. 그냥 우왕 시절까지 숙청을 당하지 않고 남아서 늙는데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나름 한 가지씩은 걸출한 능력이 있거나 최소 [[처세술]]이라도 있었다는 소리다. 최영 역시 [[왜구]]로 인해 고생하는 동안 녹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목숨을 건 무료 봉사를 해온 인물이다. 최영은 이런 시절에 어쨌든 고집 한번 안 꺾고 자기 능력 하나로 꼿꼿하게 살아서 전장에서 늙어온 사람이고 잘나서 그런지 고집도 셌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최영은 확실히 젊고 어린 신진 관료들보다는 항상 구신들을 신뢰했다. 특히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만 신뢰하고 심지어 더 높게 치는 경향도 보였다. 하지만 최영의 선택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게 친원 정권 당시 등용되었던 공민왕 초기 관료층들은 항상 무기력했고, 최영은 전쟁에 나가보지도 않고 나라 사정도 모른 채 백성을 들먹이며 보신에 급급한 문신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 격전지마다 직접 고집을 부려서 출전해야 했다. 실제로 최영이 [[수군]]을 양성하려고 했을 때, 일부 문신들은 "어차피 질 거 배를 왜 만드느냐?", "그럼 백성만 힘들다. 가만히 있자." 따위로 투덜거렸으며, 개경을 방어해야 한다고 했을 땐 "그런 거 모르겠고 도성도 내주고 피난을 가자."고 했다. 문제는 우왕 대의 젊은 [[신진사대부]] 계층과 맞서게 된 상황에서도 최영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영은 평생 완고하게 살며 나라를 지켜온 사람이었고, 이런 완고함은 크고 작은 전투가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들었던 공민왕 시기엔 도움이 되었지만 큰 전투가 다소 소강되고 치열한 [[외교]]전의 시대로 넘어간 우왕 시기엔 본의는 아니지만 [[권신]]의 편을 들게 되기도 하였다. 결국 우왕이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 하는 동안 최영은 권력을 쥐게 된 [[이인임]]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비록 정치적인 부분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최소한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거나 반발하는 모습은 딱히 없었다.] 젊은 사대부들보다는 변질된 이인임이 함께 일해온 짬이 있기에 최영을 다루는 법을 훨씬 잘 알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훗날 최영이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인임만 살려준 것도 [[무진피화|두고두고 까이는 부분]]이다. 이인임을 죽이자는 이성계와 사대부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사사로운 정 때문에 귀향 보내는 걸로 마무리 지은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부분.[* 여담으로 최영은 처형당할 때 "내가 생전에 탐오를 부린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염흥방]], [[임견미]] [[무진피화|등을 죽일 때]]는 확실히 지나쳤었다."라고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심지어 작은 죄에도 엄격하던 최영이 그랬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더 컸다. 더구나 다른 연루자들은 식솔까지 다 처형했다. 그러나 최영은 끝까지 "이인임은 국가를 안정시켜온 사람이며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주장하며 감쌌다.[* 그런데 사실 타락하기 전 기준엔 꼭 틀린 말도 아니고 타락했음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란 게 어떤 의미에선 무섭다. 그러나 타락한 후 안정시키고 지킨 공은 막장이 된 고려가 멸망만은 하지 않게 권신들과 탐관오리들의 주체 못 하는 행동에 스톱퍼와 한계를 두고 크게 군권을 건들지 않게 한 거라 그냥 병 주고, 약 주고다.] 젊을 때 [[신돈]]과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았는데, 애초에 최영은 공민왕이 [[듣보잡]]이었던 신돈을 등용하는 것부터 매우 싫어했다. 최영이 [[위화도 회군]]과 더불어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겪은 때가 신돈과 갈등을 맺던 때였는데, 당시 신돈이 추진한 [[개혁]]에 반대하다 귀양 간 사람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최영은 전투에서 영정을 도둑맞은 걸 빌미로[* 그런데 이 영정도 그냥 영정도 아니고 고려 [[세조(고려)|세조]](=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의 어진과 [[충선왕]], [[계국대장공주|한국공주]]의 어진이었다. 공민왕에게는 집안 어른이자 할아버지이고 선왕의 어진을 도둑맞은 것이라 충분히 처벌 명분은 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어진을 훼손하거나 잃어버린 경우 중죄로 처벌되었다.] 신돈에게 모함을 당해 유배당했는데, 군말 없이 갔다고 한다. 정치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개인은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없지만, '''다른 구신들의 [[타락]]은 잡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런 점이 '''위화도 회군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