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익현 (문단 편집) == 개요 == >우리나라가 고려(高麗) 이후로 명칭은 비록 중국의 번속(藩屬)이었지만, 토지와 인민과 정사는 모두 우리가 자립하고 자주(自主)하여 털끝만큼도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성기 때에는 승병(勝兵)이 백여 만이요, 재화(財貨)가 창고에 가득하였으며, 백성은 부유하고, 인구가 번성하였다. 비록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위세로도 패하여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며, [[쿠빌라이 칸|원 세조]](元世祖)가 여덟 번이나 쳐들어온 다음에야 복속(服屬)시키었다. > >우리 태조(太祖) 때에 왜적이 여러 번 침범하였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비록 명(明)나라의 구원이 있었지만 회복하여 전승(全勝)한 공은 모두 우리 군사가 왜선(倭船) 70여 척을 노량(露梁)에서 침몰시킨 데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에도 만약 [[임경업|임충민]][* 林忠愍, 충민은 임경업(林慶業)의 시호]의 ‘곧바로 근거지를 쳐부수자’는 청을 들었다면 청(淸)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멸망하였을 것이니, 그 꾀를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지 진실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백성들의 성질이 강력함은 반드시 타국에 뒤지지 않는다. >---- >ㅡ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 『면암집(勉菴集)』 제16권 「잡저(雜著)」 [[조선|조선왕국]] 말기의 [[유학자]] 중 한 사람. [[철종]] 시기 조선의 [[문신(동음이의어)#s-2|문신]](文臣)이었으며,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에는 조선 최후의 [[산림]] 중 한 사람으로 유학자들을 이끌었던 거두 중의 한 사람. [[고종]]이 왕위에 있던 시절, [[흥선대원군]] 때는 친고종 충성파 [[산림]]으로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한 몫을 했고, [[개화기]]에는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리더로서 대신해서 개국 반대운동을 이끌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독립협회]]에 반대하고 기존 질서로 돌아가려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일제 침탈이 가속화되고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달리자, [[노구]]를 이끌고 나아가 [[을사의병]] 항쟁을 했던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의 [[수구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 개화를 반대하여 조선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면서도 조국의 안위와 독립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결사투쟁했다. 봉건주의적 시각이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기존 질서를 수호하려던 인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