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익현 (문단 편집) === 단식 그리고 사망 === [[쓰시마섬]]에 유배를 왔던 그는 유배지에서 일본인이 밥을 주니 일본식으로 머리를 깎으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왜놈이 주는 더러운 음식 따위에는 입에도 대지 않겠으며 차라리 깨끗이 굶어죽을 것을 선언하고 단식 운동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고종에게 단식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이 때문에 최익현의 사망 원인이 최고령의 나이로 무리한 단식을 한 영향으로 인한 아사로 잘못 알려졌고, 위인전이나 심지어 메이저 일간지 사설들에서도 여전히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인용하는 바람에 아직도 최익현이 단식하다 사망한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일본]] 정부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아사(餓死)로 처리했다는 식의 설도 있다. 진상은 최익현과 더불어 최익현과 함께 유배를 간 제자들도 모조리 단식하였으나, 결국 일본 측에서 오해가 있었음을 알리고 머리를 안 깎아도 된다고 해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이틀 만의 일이다. 이와 관련된 것은 이 시기 함께 유배갔으며 같이 단식하였던 임병찬의 대마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70노구에 가자마자 단식하면서 4개월을 버텼다는 이야기를 역사서를 쓴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상식적으로 4주도 의학적으로 생존률이 매우 낮은데, 4개월을 굶고 생존하기에는 불가능한 기간이다. 실제로 최익현은 과거 위리안치때와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히진 않았으며 오히려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섬내 명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한일합방 전후로 일제는 유림 우대 정책을 펴는데 일본 국내에서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절을 때려부수고 신토에서 불교의식을 없애고 유교 교육을 강화했는데 합방직후에 조선시대 효자 열녀들을 포상해서 민심을 얻으려고 했고 유림들을 우대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풍토병에 걸려서 약 1개월간 투병하다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쓰시마 섬을 떠나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운구되어 [[충청남도]] [[예산군|예산]]에 안장되었다. 원래는 [[논산시]] 상월면에 있는 무동산에 안장되었으나, [[1910년]]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는데 처음 묻힌곳이 명당이라 묻혔는데 문제는 남의 소유의 토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땅주인이 최익현 선생을 존경하여 일단 매장은 하되 7개월내에 옮겨달라고 요청해서 예산으로 이장했다. 대마도(쓰시마•対馬島)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이즈하라]] 슈젠지(修善寺)에는 최익현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1914년]]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에 모덕사가 완공되었고, 영정은 여기에 마련되어있다. 사당 옆엔 그가 최후에 머무르던 고택도 자리잡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