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익현 (문단 편집) === 문호 개방 반대 운동 === 최익현은 [[흥선대원군]]과도 그랬지만 이후 운요호 사건을 시작으로 일본과 문호를 개방하는 협상이 진행되자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반(反) 개화와 외세 척결 등을 주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올린 상소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신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동양척식주식회사|재물]]과 [[일본군 위안부|부녀들을]] [[일제 강점기|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년)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純祖)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憲宗)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저들이 대포를 겨누며 화친을 하자고 하니 이건 믿을 수 없는 화친이다. * 저들이 파는 건 사치품이지만 우리가 파는건 생필품이니 민생에 해를 끼칠 것이다. * 저들은 말이 왜인이지 서양인과 다를 바 없는 도적이다. * 저들이 우리 나라에 올라오면 재물과 부녀자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과 청 조정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러시아의 침입에 방어해줄 능력이 없다는 최종 통보를 듣고 서양열강과 수교로 입장을 바꾼]] 조선 조정과 고종은 "최익현은 지금 대계(臺啓)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중에 있으면서 나라와 관련되는 문제를 말한다고 하면서 어려움 없이 상소를 올렸으며, 도끼를 가지고 와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렸으니 일이 참으로 놀랍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나수(拿囚)하라."란 명령을 내리며 최익현을 [[전라남도]] [[신안군|신안]] [[흑산도]]로 위리안치 시켰다. 다음은 최익현의 안치 이유다. ||일본을 제어하는 일은 일본을 제어하는 일이고, 서양을 배척하는 일은 서양을 배척하는 일이다. 이번에 일본 사신이 온 것이 어떻게 서양과 합동한 것이라고 확실히 알겠는가? 가령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라고 해도 또한 변란에 대처할 방도가 각기 있을 것이다. 최익현(崔益鉉)의 상소에서는 내가 사학(邪學)을 물리치는 일에 엄하지 않아 그렇다고 하면서, 한 세상을 현혹시킬 계책을 앞장서 만들고 이렇게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서 방자하게 지적하여 규탄하였다. 지적하여 규탄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동(恐動)하기까지 하였고, 공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헐뜯어 욕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두세 마디의 말은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며 차마 할 말이겠는가? 가늠할 수 없는 행동과 음흉하고 간사한 속셈에 대해서는 마땅히 전형(典刑)으로 단죄해야 하겠지만 참작해 볼 것이 있으니 최익현은 특별히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삼배도(三倍道)로 당일에 압송하라.|| 귀양 이후에도 문호 개방이 확대되자 그는 개화에 반대하는 유생 및 백성들과 함께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고 개화파 역신 처단과 외세 철수 등을 주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