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인영 (문단 편집) == 평가 ==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년 미국 월드컵]]이 끝난지 몇 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최인영의 딸이 겪었던 실화'''이다. 최인영의 딸은 당시 큰 고민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버지인 최인영이 월드컵에서의 실책을 한 것을 가지고서 일부러 자기 앞에서 놀려대는 것 때문이었다. > >"야! 느그 아빠가 '''[[알까기]]'''해서 우리나라 16강 못갔다 아이가!!" >"내가 골키퍼라도 그런건 막겠다" 등등 >아버지인 최인영 선수의 알까기를 놀려댔다. > >이런 장난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 딸은 결국 아버지인 최인영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딸의 고민을 듣고 분노한 최인영은 직접 학교로 찾아가 방과후 놀림을 일삼던 아이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실수해서 골을 먹은 것은 맞지만 내 딸은 놀리지 마라. 너희들이 PK 10개차서 내가 다 막으면 다시는 딸 애를 놀리지 말거라!! 대신!! 한 골이라도 내가 실점할 경우엔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 >친히 준비해 온 골키퍼 장갑을 주섬주섬 착용하며 아이들과의 PK에 들어간 그는 결국 뻔한 결과대로 무실점 완봉하고, '''거기있던 아이들 모두를 [[피자]]집으로 데려가서 크게 한턱 쏘고 난 후에 모두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다고...''' 그 후로 최인영의 딸은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대인배스러운 피자셔틀은 모두 잊혀진 채 '''최인영의 아이들과의 PK 대결''' 부분만 뒷이야기로 전해지며 최근까지도 축구 팬들 사이의 술안주거리로 씹히고 있는 현실이라고... 위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아이들과 같이 대부분의 국내 축구 팬들은 최인영의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어이없는 실책만을 기억하며 그의 골키퍼 능력을 폄하하곤 하지만, 그가 분명 골키퍼로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음을 부정 할 수는 없다. 최인영은 A매치 51경기에 출전해 40골만을 내주며 상당히 선방했고, [[K리그]]에서도 1983년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176경기에 나서 174점만을 허용, 경기당 1실점도 내주지 않는 훌륭한 기록을 세웠다. 한국이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월드컵 출전사상 첫 무실점 경기'''를 치루는데 일조했다는 점, 최인영의 국가대표 은퇴 이후 1995년부터 김병지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차상광]], [[신범철(축구)|신범철]]이 A매치에서 그의 공백을 제대로 메꾸지 못했다는 점과 [[IFFHS]]에서 그를 [[http://www.rsssf.com/miscellaneous/iffhs-century.html#askoy|20세기의 아시아인 골키퍼 3위]]이자 [[https://www.iffhs.com/posts/1094|대표적인 한국인 골키퍼]]로 뽑은 것은 1990년대 초반의 한국 축구계에서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만약 김병지가 당시 K리그에서 수많은 외국인 골키퍼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혜성처럼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국가대표팀은 훨씬 더 오랜기간 골키퍼 부재로 애를 먹었을 것이다.) 비록 마지막이 된 미국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평가절하된다고 할지라도, 15년간의 골키퍼로서의 경력과 기록들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계의 구세대'''[* '''구세대'''란 단어가 뜻하는, 그 당시 낙후된 한국 축구 수준을 실감하지 못하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1986년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던 멕시코 월드컵에선 현지에서 '''연습상대를 구하지 못해''' 자체 청백전으로 실전감각을 끌어올리는 삽질을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경기 시작 1주일 전에 입국해서 선수들이 시차 적응이나 현지기후, 음식 적응같은 건 변변히 못한 상태로 시합을 치뤄야 했다. 당시에 명색이 월드컵 대표팀인데도 변변한 지원인력이 없어서 팀 막내인 황선홍, 홍명보가 매일 밤 늦게까지 직접 팀원 유니폼을 빨고 야식을 준비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축구화를 챙겼다. 1990년 월드컵 감독이었던 [[이회택]]의 회고를 첨가하면,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상대 선수들이 중원에서 숫적우위로 강하게 압박하는거였다. 우리 선수들은 패스는 커녕 볼 키핑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평생 축구를 해왔지만 그런 축구는 보지도 못했다.' 이미 유럽에선 보편화된 토탈사커, 압박축구였다. 우리는 세계 축구의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축구 감독들이 다투어서 집에 파라볼라 안테나를 달고 위성방송을 통해서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야 우물안 개구리라는 걸 알게되고 1990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데트마어 크라머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선임했다. 그런데 축구계에서 척사양이 수준으로 배척을 당하고 채 뜻을 펴 보지 못하고 쫓겨났다. 반면 당시 선수들은 크라머 감독을 굉장히 높이 평가했다. 크라머의 지휘를 받아 올림픽 본선에 나간다면 세계를 깜짝 놀래킬 '사고'를 쳤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특히 [[서정원]]이 크라머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후 1992년 구 소련 출신 GK [[신의손]]이 K리그에서 뛰기 시작했고 약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신의손을 능가했다 평가되는 한국인 GK가 [[이운재]]를 포함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손이 귀화했을 때 괜히 축빠들이 온갖 설레발을 떤 게 아니다. 구 [[소련]] 제도권 축구를 배운 엘리트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대한민국]]으로 유출된 것이니.]로서 전문적인 골키퍼 코치에게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골키퍼로서 좋은 기량을 발휘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도 있다. 한국축구 골키퍼 신세대로 대표되는 [[김병지]]의 경우만 해도 같은 프로팀 내의 선후배 관계로 조우하여 '''최인영이 전문적인 지도와 더불어 자신의 오랜 노하우들도 아낌없이 전수해 준 덕분'''에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최인영 본인도 만약 유청소년 시기부터 제대로된 골키퍼 교육을 받았다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크다고. 그래서인지 해외 지도자 연수와 더불어 AFC에서 주최한 골키퍼 인스트럭터 코스를 이수하는 등, 훗날 여유가 되면 유소년 골키퍼 꿈나무들을 기초부터 잘 가르치고 싶다는 지도자로서의 포부와 꿈도 가지고 있는듯 하다. [[분류:1962년 출생]][[분류:파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선수]][[분류:골키퍼]][[분류:서울시청 축구단/은퇴, 이적]][[분류:국민은행 축구단/은퇴, 이적]][[분류:울산 HD FC/은퇴, 이적]][[분류:울산 HD FC/역대 주장]][[분류:고양시민축구단/은퇴, 이적]][[분류: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1984 AFC 아시안컵 싱가포르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FIFA U-20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81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호주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병역특례자/축구]][[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축구 감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