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정민(축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30년]] [[평양시|평양]]에서 태어나 경평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4 후퇴]]로 남하한 뒤 CIC 축구단에 합류한 후 [[김용식(축구인)|김용식]]의 발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 받은 후 10여 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지역 예선에서 최초의 [[한일전]]이 성사됐다.[* 경기 당시 최정민 선수가 신었던 축구화가 홍덕영 선수의 일화와 더불어 이 한일전을 다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3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무려 스파이크 몇개만 나있고 그것마저도 '''나무 재질'''인 다소 충격적인 축구화로 그때 당시 축구 대표팀의 열약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승만]]은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전 이후라 신예를 양성하지 못해 노장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에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광복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홈경기에서 패배를 한다면 설상가상이었다. 이 때, 재일교포 유력자들이 민족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상기시켰고 [[이유형]]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의 허락이 떨어졌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마저 선수들을 모두 자택에 불러모아 "패배한다면 [[현해탄]]을 건너지 않고, 고기밥이 되어도 상관없느냐?"라고 당부했다. 이에 선수들은 모두 동의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일본 원정길을 떠난다. 일본은 서류의 누락을 이유로 입국을 미루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최정민은 한국 축구 최초의 [[한일전]] 원정 두 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6골로 [[차범근]]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이 부문 최다 권위자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팀]]을 1승 1무로 이끌어 일본을 이기며, 16개국 본선 54월드컵으로 진출했다.[*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 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열악한 시점이었는데, FIFA는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타 대륙에 비해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로 참패하고 탈락하자 FIFA가 아시아들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들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허나, 16개국 본선에서는 스코어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참패만 맛보고 돌아오고 마는데 [[1950년대]] 전후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급 국가로 제대로 된 세계대회 경험이 전혀 없었다. 양복조차도 외상으로 맞춰입은[* 그런데 당시 국내 양복점이라 품질이 똥같은 나머지 장시간 비행에 단복이 망가져서 유럽 기자단의 조롱을 받았다.] 대표팀은 미군의 수송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로 향했으나 경험이 없고 행정력이 미숙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며칠을 허비하다가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가 있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비행기표를 제대로 못 구해서 한날 한시에 같이 이동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코치진의 좌석은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영국 여행객 부부의 호의에 기대서 양보받았다. 방콕에서도 스위스 직항이 아니라 캘커타 경유였다. 경기 이틀 전 그것도 밤 10시에 도착한 대표팀은 숙소를 예약했을 리도 없고, 스위스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주무가 있을 리 없는 선수단은 축구화와 유니폼 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당연히 시차고 여독이고 피로가 풀렸을 리도 없는 대표팀은 당시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헝가리와의 1차전에서 후반전 시작 후, 얼마 못 가서 탈진해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결국 2차전은 2군을 내보내고 만다. 이 때 선수단은 [[6.25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배들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던 노장급의 30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40대 선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나, 위엄차게 아시아 무대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 [[1956년 AFC 아시안컵|1956년 1회 홍콩 아시안컵]], [[1960년 AFC 아시안컵|1960년 2회 아시안컵]]을 2연패했다. 본선 4강 결선리그로 승자를 결정짓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승 1무였는데 이스라엘이 베트남을 꺾고 2승 1패를 차지하게 되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베트남을 맞이하게 된다. 최정민은 이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3번째 골과 5번째 골을 넣으며 5:3 승리에 기여한다. 두 번째 대회에서도 최정민은 첫 경기 베트남전에서 3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5:1로 압승을 거뒀으며, 이 대회는 한국이 3전 전승을 거두며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두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고[* 우승은 2차례 다 대만이 차지했다.]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명성을 드날렸으며, 최정민도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베이퍼웨어|1960년 이후, 아직까지도 AFC 아시안컵을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