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중호 (문단 편집) === 초년기 === 최중호는 1891년 1월 20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이미 사망했기에, 모친 황성애(黃聖愛)가 그를 홀로 길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7살 때 유중현(柳重賢)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아들 둘을 뒀지만 모두 홍역으로 잃었고, 1914년에 낳은 셋째 최채(崔采)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윤신, 최윤경, 최윤애를 낳았다. 최중호는 1906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김구]]와 만나 그와 함께 신학문을 공부했고, 1907년 김구가 양산학교에서 소학부 교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양산학교 중학부에서 공부했다. 양산학교는 1907년 김효영과 손자 홍량 등이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 위해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이후 최중호는 평양에 있던 대성학교에서 공부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최중호는 김구로부터 총애를 받은 학생 중 한 사람이었고, 최중호 또한 누구보다도 김구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김구는 직접 상투를 자른 뒤 가위를 들고 최중호의 상투를 잘라주기도 했다. 1911년 2월, 최중호는 [[105인 사건]]에 휘말렸다. 한달 전에 먼저 체포된 김구가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의 이름을 대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말하고 만 것이다. 김구는 이에 대해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놈들이 또한 정신을 잃도록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학생 중에는 누가 너를 가장 사랑하더냐?”라는 말에 졸지에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하던 최중호를 말하고선 혀를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 오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벌써 언제 잡혀왔는지 반이나 죽은 것을 끌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최중호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뒤 서대문 형무소에서 미결수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유배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1914년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일본 관청을 습격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또다시 체포되어 해주지방법원에서 15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최중호는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7년 탈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