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철한 (문단 편집) == 라이벌 == 동갑내기 라이벌 [[박영훈(바둑)|박영훈]] 九단과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국내에서의 입지는 최철한, 세계대회의 입지는 박영훈이 앞서 나간다. 최철한은 박영훈이 해내지 못했던 한국바둑랭킹 1위와 국제전인 초상부동산배에서 한국팀 주장으로서의 활약,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을 달성했다. 반면 박영훈의 세계 대회 성적은 우승 3회[* 후지쯔배 2회, 중환배], 준우승 6회[* 삼성화재배 2회, LG배, 춘란배 2회, 몽백합배]로 우승 2회[* 응씨배, 중환배], 준우승 2회인[* 응씨배, 후지쯔배] 최철한에 우위에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최철한이 우위였지만 06~09년은 박영훈의 우위[* 최철한은 응씨배 준우승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10년도 초중반은 최철한이 다시 성적에서 앞서나가다가 16년부터는 박영훈의 3년 연속 세계대회 결승진출로 앞섰다. 2023년 기준 상대전적은 23승 24패로 최철한의 열세. [[이창호]], [[이세돌]]과 3인 간의 관계도 흥미롭다. 이세돌과 최철한이 한창 두각을 나타낼 때 이창호 다음의 한국 바둑 1인자 계보를 누가 이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최철한은 국내 최고의 전통 기전이자 이창호의 상징과도 같던 [[국수전]]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 기사 중 최초로 상대 전적에서 이창호를 압도하며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반면 이세돌은 이창호에게 상대전적도 뒤졌을 뿐더러 큰 대회에서 유난히 발목을 잡혔다. [* 2003년 LG배 결승전에서 설욕에 성공하지만 2001년 LG배 결승전, 응씨배 4강전 등에서 이세돌은 이창호에게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최철한은 이세돌에게 상대전적 및 국내대회와 세계대회의 결승무대에서 연거푸 이세돌에게 패배했다. 마치 [[가위바위보]] 같은 (최철한>[[이창호]]>[[이세돌]]>최철한) 이 세 기사간의 경쟁은 [[이세돌]]이 랭킹 1위와 세계대회에서 독주하며 끝을 맺었다. [[이창호]]를 1인자 위치에서 끌어내린 사람은 최철한이지만 정작 1인자가 된 이는 [[이세돌]]이라는, 최철한 입장에서는 얄궂은 상황. 생각해보면 [[조남철]]과 [[김인(바둑)|김인]]의 시대에 균열을 낸 건 [[서봉수]]지만 1인자가 된 건 [[조훈현]]이었고, 조-서 양강 시대에 균열을 낸 건 [[유창혁]]이었지만 1인자가 된 건 [[이창호]]였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