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춘명 (문단 편집) == 상세 == 고려의 대명문인 해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여몽전쟁]]당시에 장군으로 참전하였다. [[고종(고려)|고종]] 18년 [[여몽전쟁#s-3.1|몽골의 제1차 침입]] 당시 자주(慈州)에서 서쪽 25리 근방에 위치한 [[제1차 자모산성 전투| 자모산성에는 자주부사(慈州副使) 최춘명(崔椿命)이 성을 포위한 몽골군에 맞서 항전했다.]] 최춘명을 중심으로 고려 백성들과 고려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몽골군이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231년 12월 [[살리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 조정은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최춘명에게도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최춘명은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살리타이와 [[회안공|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이 강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에 살리타이가 왕정에게 "자모성만 항복 안 하고 뻐기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서 항복시키시죠."라고 하자, 왕정은 [[대집성]](大集成)과 몽골 관리를 자모성으로 보낸다. 대집성은 최춘명에게 "좋은 말 할 때 빨리 항복해라!!"하지만 최춘명은 역시나 항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최춘명에게 화가 난 대집성은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서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최이(崔怡)]]에게 최춘명을 모함했고, 이를 들은 최이는 최춘명에게 사형을 내리는 걸 허락했다. 신하들은 할 수 없이 최이의 말에 수긍했지만, 유승단(兪升旦)은 결코 최춘명을 죽여선 안 된다며 반대를 했다. 하지만 최이는 이를 무시하고 내시(內侍) 이백전(李白全)을 보내 최춘명을 처형하게 한다. 최춘명은 성문을 열고 나와 어명을 받고 항복했으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얼굴빛과 행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를 본 [[다루가치|몽골 관리]]는 "이 자가 우리 명령을 어겼으나 당신들에게는 [[충신]]이니 죽이지 않겠다. 그대들이 우리와 화친을 약속했으니 성의 충신들을 죽이는 게 옳겠는가?"라며 오히려 최춘명을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에는 석방되었다. 이후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이 되었고, 추밀원 부사로 발탁되었다. 1250년에 사망했고 관직은 위위경(衛尉卿)까지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