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치원 (문단 편집) == 기타 == * [[마산]][*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에는 말년의 최치원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많다. 마산합포구에서 가장 큰 동 중의 하나가 '월영동'으로, 이는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에서 비롯했다. 현재 월영대는 누각이 잠겨 있어 담장 밖에서만 들여다봐야 하지만, 월영대 앞 경남대학교 입구 오거리는 정식 공문서에서는 월영광장이라고 불린다. 또한 마산지역 옛 [[산복도로]]의 이름은 최치원의 별호 중 하나인 [[고운로(창원)|고운로]](孤雲路)이다.[* [[마산]]의 산복도로는 [[마산여자고등학교]]와 [[마산중앙고등학교]], [[마산제일여자고등학교]] 앞을 지나는 구 산복도로가 고운로이고 이후 산기슭에 새로 뚫은 큰 도로는 무학로이다.] 마산 앞바다에 있는 '돝섬' 또한 암돼지 요괴와 최치원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산]] 문서 참조. * [[부산광역시]]에 있는 [[해운대]] 지명도 최치원에게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최치원이 새겨놓았다고 알려진 비문이 [[동백섬]] 측에 남아있다.[* 오래되다 보니 이 비문은 가운데 雲 자가 풍화가 심해 많이 지워진 상태다.]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 문서 참고. 참고로 최치원과 관련이 있다는 점 덕분에 최치원이 중국에 있을 때 머물렀던 [[장쑤 성]] [[양저우시]] 웨이양구와 부산 해운대구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32030465&code=990503|웨이양구에는 최치원 기념관도 있는데]],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외국인]] 기념관(第一外國人紀念館)이라고 입구에 써 있다. * [[역사스페셜]] 113회 <중국은 왜 최치원을 기억하는가>가 2012년 9월 6일 방영되었다. 제목 그대로 중국에 남은 최치원의 흔적을 다루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젊은 시절 중국에서 지내던 최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각종 한국사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매년 몇 문제씩은 시험종류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출제된다. 특히 수 많은 저서를 남겨 지엽적인 문제를 선호하는 공무원시험에 더욱 많이 출제되며 2016년 국가직 7급에서 그의 저서가 만점방지용 문제로 출제되어 많은 공시생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든 인물이다. * 2018년 5월에 지리산 폭포 옆에 완폭대 석각이 발견되었다.[[https://youtu.be/rre4Gb0TrVc|#]] * 2020년 3월,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주한 중국 대사관이 대구광역시에 마스크를 보내며 상자에 최치원의 문구를 인쇄하여 보냈다. >'''道不远人,人无异国'''[* [[정자(한자)|정자]]로 쓰면 '''道不遠人,人無異國'''이다.] >도불원인, 인무이국 >: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 국적(國籍)은 다르지만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양국 관계를 나타낸다.] * 문장가로 더 유명하지만, 한국 [[서예]]에도 한 획을 그었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0570|최치원의 글씨체]] * 경주에서 [[월정교]]를 복원하면서 북쪽 현판을 최치원의 글씨체로 복원했다. 남쪽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 글씨체로 했고 둘 다 집자현판에서 인용해서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