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치원 (문단 편집) ===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 === 고려 후기의 문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요,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다"'''라는 참서를 건네 주었고, 이 때문에 신라 조정에서 파직당해 가야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리고 이 참서를 올린 곳이 지금의 경주 남산 밑에 있는 상서장(上書莊)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사강목]]에도 같은 말이 적혀 있으며, [[안정복]]은 최치원이 신라에서 고려로 갈아타 지조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898년에 왕건은 [[궁예]]의 일개 부하에 지나지 않았고 이 때까지는 딱히 내세울 만한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왕건 본인을 포함해 누구도 왕건이 500년 '[[고려]]' 왕조의 창시자가 될 거라고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시점이었기도 하다. 그리고 최치원이 추켜세웠다는 곡령이 왕건이 아닌 궁예의 고려를 말한다 해도 최치원이 신라 조정을 나온 때는 아직 고려 왕조가 건국되기 전인데다 궁예 세력도 [[양길]]과 대치하고 있던 중소 군벌 시절이라 대세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으로서 확인되는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908년이고 857년생인 최치원의 나이가 이 때 51세였는데 십여 년 뒤인 왕건의 거병 시점에는 61세로 그때까지 살아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왕건을 지지하던 승려 '희랑'의 견해를 존중하여 시를 써주었다 해서 이의 가능성 자체는 긍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쪽도 '당시 신흥 궐기하던 송악 세력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정도로 보고 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11|예시]] ] 더구나 최치원은 신라로 귀국한 후 왕실의 덕을 많이 본 당사자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컸기 때문에 다른 6두품들과는 달리 쉽게 호족들과 결탁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어서 끝내 좌절한 채 은거에 들어간 케이스였다. 당장 위에 언급한, 최치원의 확인되는 마지막 행적이자 908년에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봐도 최치원이 [[이재]] 장군을 신라 조정의 [[충신]]이라고 칭찬하는 내용이다. 즉 최치원의 충성심도 908년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때문에 매우 큰 명성을 떨쳤던 학자 최치원을 고려 시대에 들어와 높이는 과정에서 후대에 가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최치원의 후배격인 [[최언위]], [[최승로]] 등의 문인들이 훗날 고려에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점에서, 스승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도선대사'에게 신라의 앞길을 물을 때와 정치를 포기한 채 황음에 빠진 [[진성여왕]]에게 직언을 하는 장면에서 등장했으며, 이후로는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그 존재가 간혹 언급될 뿐이다. "계림은 황엽, 송악은 청송"이라는 말은 도선대사가 한 말로 바꿔 각색하고, 왕건과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모르는 사이가 됐다. 사실 고증이나 개연성에 있어서는 이 쪽이 맞다고 봐야 한다.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163화에서 견훤은 왕건의 심사를 긁는 국서[* 평양성 누각에 활을 걸고 대동강 물을 말에게 마시게 하겠다는 것.]를 보내는데, 열받은 왕건이 견훤을 동탁에 비유하며(고려사에서도 실제로 왕망과 동탁에 빗댔다.) 그를 비난하는 답서를 후백제편 사신으로 보낸다. 국서를 보낼 때 이 글을 최치원이 썼다고 알려줘 백제를 역으로 도발(…)하기도 했다. '토황소격문'에 빗대어 후백제를 한낱 반란군으로 조롱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같은 3최의 일원인 [[최승우]]는 "최치원은 가야산 깊숙히 들어가 몸을 숨기며 살고 있습니다. 글을 잘 짓기는 했으나, 문장으로 보아 '고운'의 글은 아닙니다."[* 풀이를 하자면 첫째로, 산 속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 글을 남기냐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온 견훤의 대답이 "그럼 그렇지. '고운'이 고려에 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 천하 민심을 흔들 일이니까"라고 한다. 둘째로, "문장으로 보아 '고운'의 글은 아닙니다"라는 것은 곧 최치원의 문장력을 이미 알고 있던 최승우가 그 글은 최치원의 것이 아니라고 파악한 것이다. 글 자체는 잘 쓰기는 했으나, 문장의 특성이 결코 최치원의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라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