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치원 (문단 편집) === 유학자 성인 최치원? === 최치원의 업적은 신흥 국가 고려에서 일한 [[최언위]], [[최승로]] 등의 후배들에게 자연스레 이어지면서 한국 유학 사상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다. [[고려]] [[현종(고려)|현종]] 시기 최치원은 내사령[* 고려 3성 중 하나인 내사성의 장관. 문종 15년에 내사령은 중서령으로 개칭되었다. 품질은 종1품, 정원은 1인이다.]으로 추증되었고,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으며 홍유후 [[설총]]과 함께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의 사상은 난랑비서라는 글에서 [[화랑]]의 사상을 역설하는 부분이나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http://db.history.go.kr/id/gskh_005_0010_0310_0030|비문]]에서도 드러나듯 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유, 불, 도의 가르침을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려고 했고, 그는 세 종교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도로 통하므로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불도의 가르침을 모두 깊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쓴 여러 고승비[* [[국사#s-3|국사(國師)]]나 [[왕사#s-2|왕사(王師)]], 혹은 그에 준하는 [[고승#s-1]]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다.]에서도 불교만이 아닌 유교와 도교의 경전을 폭넓게 [[인용]]한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고려 시대에도 유교 정치 이념을 상당히 강조한 최승로와 같은 유학자조차도 "불교는 수신의 근원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숭유억불]]이 더 강화되어 삼교 중 불, 도를 배제한 유를 추구한 후대 조선 시대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의 인생 행적도 유학자의 이미지보다는 주로 문인 예술가의 이미지가 짙은 탓에 이후 [[퇴계 이황]]은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최치원의 비문학적 활동이라는 것이 결국 시무 십조인데, 이것은 유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실무형 [[관료]]로서의 모습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유학의 선구자로 존중받았다는 이야기는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결과론 외에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한국 [[도교]]의 비조로 꼽히고 3교 융합의 이미지도 강해서 유학자 최치원의 이미지는 지금도 약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최치원이 왕건을 지지했다는 표현은 문묘 배향 과정에서 그 이유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계가 점점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 또는 거란족의 침략 등 혼란한 상황에서 현종이 충신으로서 최치원과 설총을 강조하였다는 등의 평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