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치원 (문단 편집) === 신라에서 온 유학생 ===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고군산도에는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손이라는(金豚始窟) 전승이 전해져 온다.] 친형 현준(賢俊)이 있었으나 [[출가]]해 [[해인사]]로 갔기 때문에[* 형이 있는 곳이라서인지, 최치원은 말년에 해인사를 자주 찾는다.] 집안의 사실상의 장남인 최치원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인 868년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 12살은 현재에도 [[미성년자]] 취급을 받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신라 당대에도 [[관례]](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어리다 못해 핏덩어리였다(관례는 보통 14, 15세 정도에 치른다). 이런 어린 나이의 아들을 아버지가 유학보내야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신라의 출셋길이나 관로(官路)는 철저하게 진골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냉혹하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듯하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 868년 출발, 874년 9월 급제.]만에 18세 나이[* 당시 빈공과에 합격한 가장 이른 나이가 50세였다.]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다.[* 이걸 두고 [[빈공과]]는 [[발해]] 출신이 많이 붙었는데 신라에서 뛰어난 인재가 왔다라고 표현했다. 역대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모은 '등과기고(登科記考)'에 최치원은 '지난해 신라가 발해인에게 장원급제를 빼앗긴 수치를 씻었다'라고 적었다. 신라인과 발해인이 라이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 다만 남북국시대 당시 양국이 서로를 남국,북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과도한 확대해석이다.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이는 단순히 북쪽나라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신라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발해에 대응되는 남국으로 인식했다는 근거는 없다.]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관서로 올라가지,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에 임명하지는 않는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