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팔용 (문단 편집) === 초년기 === 최팔용은 1891년 7월 13일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에서 전주 최씨 최중한(崔中漢)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향리 서당인 당남숙(塘南塾)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 외에는 그의 집안 내력과 재력 등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이 미비해 확인할 수 없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인 1910년 신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했는데, 이 과정 역시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함경도에서 설립된 학교들 중 한 곳에서 재학 후에 유학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팔용은 일본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준비에 착수했다가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서 영어와 수학을 독학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1910년 10월 10일에 강화양이 서북협성학교를 인계받고 이를 발판으로 설립한 오성학교(五星學敎)에 들어간 그는 1915년 제5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입학했고, 대학 재학 중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에 가입했다. 학우회는 종래의 도별 유학생 구락부를 기초로 하여 1912년 10월에 조직된 단체로, 전체 한인 유학생을 통할하는 중추기관으로 장기간 유학생의 모든 활동을 관활했다. 학우회는 정기총회나 졸업생 환소애회, 웅변회, 망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회합이 있을 때마다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학우회는 기관지로서 1914년 4월에 <학지광(學之光)>을 창간해 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의무감과 이에 따른 계몽의 필요성, 서구 문명의 소개, 지식인의 현실 참여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최팔용은 1917년 2월 4일 학우회 결산총회에서 부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30일 결산총회에서 평의원과 <학지광> 편집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에서도 편집부장을 맡아 [[2.8 독립 선언]]으로 수감될 때까지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학지광에 총 5개의 글을 기고했는데, 그 중 1917년에 쓰여진 3개의 글은 사람의 본질과 도덕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1918년과 1919년에 쓰여진 글은 개인보다는 사회를 고찰하는 내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