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팔용 (문단 편집) === 고려공산당 === 최팔용은 1920년 가을 장덕수, 김철수 등 2.8 독립 선언 때 뜻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최린]]의 집에 모여서 일본제국주의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목적하에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에상하이 프랑스 조계 안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고려공산당의 재무와 내지 간부를 담당했다. 내지 간부는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 각 단체를 지도할 '전국총회'의 간부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후 1922년 4월 1일부터 6일간 청년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가 열렸는데, 그는 대회 5일째 회의에서 장덕수, 김사국 등과 함께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려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이보다 앞서 김립과 [[박진순]]이 모스크바로부터 40만 루블의 자금을 상하이로 가지고 와서 국내에 송금했다. 그런데 그 자금 대부분이 장덕수 수중에 들어갔고 공산주의 활동 이외의 일에 소비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돈이 공산당선전비로 되어 있었지만, 그 자금을 인수한 이들의 다수는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간부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팔용, [[오상근]], 장덕수 등이 그 자금을 인수해 경상, 충청도의 각지에서 순회 강연을 했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서울청년회는 이 사건을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지칭하고 사건 관련자들을 제명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청년연합회에서 탈퇴하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제명안이 부결되자, 서울청년회는 4월 3일 긴급임시총회를 소집하여 8개 지방 청년 단체와 함께 청년연합회에서 탈퇴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는 최팔용, 장덕수, [[오상근]]을 조선청년연합회 간부진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2달 뒤인 6월 13일에 다시 임시총회가 소집되었고, 최팔용은 서울청년회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간 최팔용은 1922년 11월 2일 오후 10시경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31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팔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전주 최씨]][[분류:홍원군 출신 인물]][[분류:1891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