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현(북한) (문단 편집) == 여담 == *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격이었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권총을 차고 들어갈 정도였으며[* 당연한 말이겠지만 북한 내에서 수령을 영접하기 전에는 검문을 통해 무장해제하고 들어가야 한다.] 1949년 옹진지구 38경비여단장으로 있을 때는 전기 철조망에 한국군 시체 3구를 매달기도 했고, 같은 해 남한의 백골부대(38유격대)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면서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였다.[* 정병준 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p.256~257)] * 인민군 사단정치위원을 하다가 숙청되어 중국으로 탈북한 강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에 임업소 지배인에게 자재를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다가 지배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일본놈 배급 받아먹던 놈 주제에 끝까지 안줄거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지배인이 그런 말이 어딨냐고 항의하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배인을 쏘아죽였다고 한다. 이에 평안도가 발칵 뒤집어지고 놀란 김일성도 그를 평양으로 소환해 질책했지만 개새끼 한마리 죽인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김일성에게도 대드는 등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찌 고쳐지지가 않았다고. 주영복의 증언에서도 제재소 지배인 총살 사건이 언급되는데, 다만 여기서는 자재 문제가 아니라 최현이 만포제재소에서 난 화재의 원인을 지배인 김복명에게 추궁하자, 김복명이 실화(失火)일 뿐이라고 반발했고 이에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평양으로 소환되었다. 방원철 회고록에서는 개천 국영목재소 화재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선인민군 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1958년에 남파공작원으로 발탁, 1970년에 체포되었던 김진계가 13사단 복무 시절인 1951년 9월에 2군단장 최현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함경도 출신임에도 서울말에 능통했다고 한다. 어느날 최현이 야전병원을 순시하던 중 침상 밑이 왜 이렇게 더럽냐고 군의관을 질책하였는데 군의관이 담당병들이 게을러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최현이 하전사만 청소하라는 법이 어딨냐며 군의관에게 즉시 병실을 청소할 것을 지시했다. 군의관이 걸레질을 하고 나오자 최현은 군관도 이런걸 직접 해봐야 하전사를 이해하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최현을 아주 좋아하면서 "군관에겐 범이오 전사에겐 아버지다"라고 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김일성에게 사적으로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사였다. 김책과 최용건이 김일성의 선배격이라서 김일성이 존대한 형태라면 이 사람은 김일성과 동일선상에서 있던 형태다.[* 대한민국에서의 사례를 찾자면 육사 11기 동기생인 [[정호용]]이 [[전두환]]에게 반말을 하는 것과 같은 사례라고 보면 편할 듯.] 김일성 본인도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가 나에 대해 경어를 사용한 것은 다만 공식석상에서뿐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우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격식을 제쳐놓고 오히려 그 우정에 진실성과 참신성을 부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숭배와 더불어 빨치산 회상기 학습을 열심히 하면서, 김일성의 전우이며 민족보위상을 지내는 그 역시 절찬리에 강연에 불려다녔지만 말주변도 없는 자신을 왜 부르냐고 투덜거리면서 나오더니 빨치산 시절에 들은 갖은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좌중을 경악하게 하곤 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수령 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에도 최현의 도움이 컸다. 1972년 자신의 회갑 잔치에서 김일성이 빨치산 원로들에게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 라고 묻자 최현이 '''"당연히 [[장남]]이 해야죠? 장남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라고 답한 것이다. 당시 원로들은 내심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__"수령님, 당연히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__''' 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라고 물어봤는데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고 분위기가 경직되어 김정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는 부주석 [[김동규(북한)|김동규]]가 김정일 후계 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자세한 것은 [[김동규 사건]] 참조. 그리고 [[김정일]]은 최현이 사망하고 난 뒤 후계자 자리를 받게 도와준 보답으로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 김정일과 [[김정은]]의 대표적인 충신이고 현재 북한의 의전 서열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사생아다. 혼외관계로 최룡해를 낳자 잠시 파직되기도 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최현,version=48)] [[분류:1907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훈춘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조선인민군 제2군단장]][[분류:조선로동당 3기 중앙위원회 위원]][[분류:조선로동당 4기 정치위원회 위원]][[분류:조선로동당 4기 비서국 비서]][[분류:조선로동당 5기 정치위원회 위원]][[분류: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분류: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분류:조선로동당 군정지도부장]][[분류: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분류:북한 국방상]][[분류:북한 국방성 부상]][[분류:북한 체신상]][[분류: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분류:5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분류:6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분류:7기 중앙인민위원회 위원]][[분류:5기 국방위원회 위원]][[분류:6기 국방위원회 위원]][[분류:7기 국방위원회 위원]][[분류:3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분류:4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분류: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분류: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분류: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분류:대성산혁명렬사릉 안장자]][[분류:공화국영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