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홍희 (문단 편집) === 월북 활동과 사망 ===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홍희는 점점 [[북한]]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고, 북한의 요청에 따라 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보내 제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은 1981년 1기생 사범을 교육하고 1982년 2기생 교육을 한 뒤 3기부터는 자체 교육을 하겠다고 통보했고 사범양성 및 파견과 사범단 운영도 점차 자체적으로 하려는 등 은근히 마찰도 빚게 된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훗날 최홍희의 아들 최중화는 2008년 9월, 34년만에 남한에 귀국한 후 기자회견에서 "[[장웅]] 계열의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전위조직"이라며 북한이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최홍희의 부인과 두 딸은 지금도 장웅을 정식 계승자로 인정하고 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철권으로 유명한 황수일도 장웅 계열이다.] 한편, 이런 활동은 국제태권도연맹 내에서도 논란이 되기 충분했다. 최홍희의 의도야 북한도 남한과 같은 한민족이므로 태권도를 보급해야한다는 생각이었겠지만[* 최홍희는 가라테를 참고하긴 했지만 자신의 철학이 더해져 새로운 무술로 탄생한 태권도를 이전부터 같은 민족의 나라인 북한에도 전해주고 싶었다. 실제 [[통일]]이 되면 하나된 태권도를 구사하는 남북한도 꿈꿨다고. 또 [[무술]]은 배움에 있어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홍희가 북한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전해준 후에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후에는 후계자 결정에 있어 많은 갈등을 초래했으며 이런 갈등이 나아가 [[국제태권도연맹]]의 분열로 연결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최홍희가 너무 낭만적이었던 거 아니냐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근데 이건 남북한이 도긴개긴이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WT도 당시 ITF에 대항한답시고 박정희 정권의 뜻과도 결합되어 태권도 택견 전통무술 드립을 자행하는 흑역사를 찍는다. 무술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진짜 무도인들만 불쌍하게 된 셈이다.] ITF내 사범들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은 ITF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최홍희를 따르는 사범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의 최측근 또한 이런 그의 친북적인 경향에 등을 돌렸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반론측에선 최홍희가 [[북한]]과 [[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왜곡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1994년에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여부를 둘러싸고 [[세계태권도연맹|WT]](당시 WTF)와 [[국제태권도연맹|ITF]]간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특히 최홍희는 WTF가 내세우는 형식이 [[가라테]] 동작을 모방한 가짜 태권도라고 비난했다. 물론 WTF 측에선 펄쩍 뛰었다. 그러나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WTF의 태권도가 2000년 [[2000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이때 의외로 최홍희는 (본인 기준) 사이비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건 유감이지만 태권도 세글자는 확실히 이름을 남겼으니 후손을 위해서도 좋은거라며 대승적 관점에서 이를 환영했다.[* 사실 이때 투닥투닥하긴 했지만, ITF가 가진 글로벌 인프라도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는데 유무형의 영향력을 끼치긴 했다.] 1998년에는 자서전 《태권도와 나》를 집필하고, 이 무렵 주변의 권유에 따라 당시 [[김대중]] 정부에 자신은 과거 독재자들을 미워한 것이지 한국 정부를 미워한게 아니라며 남한 [[귀국]] 의사를 밝혔으나, 그동안의 친북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면 귀국시켜주겠다는 식의 제안이 오자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 "[[안기부]]가 마치 [[죄인]]을 취조하는 식의 [[질문]]을 보내왔다"는 최홍희의 말 속에 방한이 무산된 속사정을 엿볼 수 있다. 2000년대에는 WT와 통합도 해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WT 관점에선 흡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일축했다는 설도 있고, 역으로 ITF 관점에선 당시만 해도 ITF태권도가 해외 특히 북미를 중심으로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때라 이제 막 올림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WT태권도보다 도장도 많고 수련인구도 많은데 뭐가 아쉬웠겠냐는 반응도 있다. 실제 ITF태권도 세가 예전보다 약해지게 된 것은 최홍희 사후 단체의 분열에 따른 계파 싸움과 공산권 수교,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등으로 인한 WT태권도의 급격한 성장이 컸다. 그래서 ITF쪽에선 WT가 최홍희에게 먼저 통합 얘기 꺼냈다 까이고 나서 이런 식으로 왜곡한다는 주장도 하는데, WT쪽에선 또 뭔소리냐고 일축하는거 보면 참 [[답이 없다]].][* 다만 이런건 있다. 최홍희는 태권도의 [[스포츠]]화를 누구보다 경계하던 사람이었다. 자기가 만들려고 한건 한국인에게 맞는 무도, 격투술이기도 했고. 근데 그런 사람이 올림픽 때문에 양 단체 통합을 추진했다는건 그의 철학과는 좀 어긋나긴 한다. 물론 ITF쪽 룰에 좀 더 가깝게 통합한다는거면 몰라도. (사실 ITF가 WT보다 실전성이 낫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작금의 [[MMA]] 시대에선 ITF도 실전성만으로 어필하기엔 이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WT보다 박진감 넘치는 라이트 대련이란 식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01년에는 아들인 최중화와 ITF 해석을 놓고 갈등이 생겨 결국 최중화를 제명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이후 부자 사이는 사망 1달여 전 겨우 화해하고 회복하지만, 공적인 문제는 따로 놀게 된다. [[위암]]으로 북한에서 치료를 받으며 캐나다와 왔다갔다하다 2002년 6월 [[평양]]에서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조국전선,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최홍희선생은 오래동안 남조선과 해외에서 곡절 많은 길을 걸어 오다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품에 안겨 비로소 애국의 길을 찾고 태권도로 나라의 통일위업에 이바지해 온 애국지사이며 이름 있는 활동가이다. (...) 선생은 해외에서 통일애국활동을 벌리는 기간 여러차레 조국을 방문하여 위대한 주석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자주정치와 민족대단결사상, 넓은 도량에 매혹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자애로운 어버이로,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열렬히 흠모하면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 왔다. (...) 최홍희선생의 서거는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 민족과 모든 태권도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된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ITF의 후계자로는 당시 IOC 위원이던 장웅을 지명했다.[* 이후 국제태권도 연맹은 장웅 계열과 최중화 계열, 쩐꽌 계열로 갈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