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추수폭동 (문단 편집) == 배경 == 1927년 1월 마오쩌둥은 <호남 농민운동 고찰보고>를 제출하며 농민들의 '혁명적 열기'가 폭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농민혁명을 비롯한 급진적 개혁과 폭동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당이 우한과 난징으로 분열되고 국공합작을 표방했던 우한과 공산당의 결렬도 가시화되자 1927년 7월 12일, 코민테른은 지령을 내려 총서기 천두슈를 실각시키고 지도부를 개편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장궈타오]], [[리리싼]], [[저우언라이]], 리웨이한, 장타이레이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천두슈는 사직서를 내고 잠적했다. 중앙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3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 1.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거나 조종하고 있는 부대를 [[난창 폭동|난창에 집결시켜 폭동을 준비한다.]] * 2. 호남, 호북, 강서, 광동 4개 성의 농민을 조직하여 추수기에 폭동을 일으킨다. * 3. 중앙회의를 소집하여 새로운 시기의 방침과 정책을 토의하고 결정한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하고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설립하여 국민당의 명의로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한 국민정부는 이틀 후인 7월 15일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폭로하고 [[국공결렬]]을 결정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사실상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새로운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는 중국 공산당이 지금껏 [[천두슈]]의 지도 아래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고 가혹하게 비판하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취추바이]]를 새로운 [[총서기]]로 추대하고 강경한 혁명노선을 주문했다. 이에 취추바이는 취추바이 노선이라 불리는 강경한 폭동, 파업 사주 노선을 강행하였고 기존에 결정한 추수폭동의 실행 역시 재확인했다. 9월이 폭동의 고조기로 뽑힌 이유는, 9월 중추절 기간 동안 고리대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농부와 지주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치닫기 때문에 농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폭동을 교사하기에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추절 폭동]]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