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추축국 (문단 편집) === [[나치 독일]] === 나치 독일은 이 추축국의 리더격에 해당하는 나라였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이후 독일은 자국의 재군비에 제동을 거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노골적으로 재군비 준비를 하였고, 급기야 1936년 3월에 [[라인란트 재무장]]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며 재군비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이 무렵까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국은 적도 동맹도 아닌 미묘한 관계였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국제연맹]]의 질타를 받아 이미 1933년에 독일과 함께 국제연맹을 탈퇴한 나라였지만 문제는 이탈리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국제연맹에 잔류하면서 나름대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움직였다. 특히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히틀러를 탐탁찮게 생각했으며,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자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영국, 프랑스와 스트레사 체제를 결성하여 "만약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독일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아무리 반쪽짜리 유사 열강 이탈리아라지만 이제 막 재무장을 시작한 독일이 이탈리아에 덤벼들면 어떻게 될 지는 자명했고 결국 히틀러가 한발 물러나면서 전쟁은 피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점점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일본과 1935년에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으로 역시 국제 왕따가 되어가던 나치 독일은 서서히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이들끼리 힘을 합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특히 독일, 일본 모두 강력한 [[반공]] 국가였는데, 두 나라 사이엔 [[소련]]이라는 이데올로기상 거대한 적국이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팽창을 같이 힘을 합쳐 견제하자는 발상을 하였고, 그리하여 1936년에 독일과 일본 두 나라는 [[방공 협정]]을 체결해 사실상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이탈리아가 슬슬 [[꼽사리]]를 끼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협약 체결로 영국, 프랑스와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1935년 영국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몰래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인정했다. 이탈리아는 기껏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했더니 영국이 그걸 먼저 깨버렸다고 판단하여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탈리아는 스트레사 체제로 영불이 독일을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탈리아가 노리고 있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도 영불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여 1936년 전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는데 이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받아 이탈리아 역시 국제 왕따가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를 비난한 국가들에는 이탈리아가 대독일 동맹국이라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도 있었고 배신감을 느낀 이탈리아는 결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기대를 접고 독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도 1937년에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했고, 그 해 11월 6일에 [[방공 협정]]에 가입해 사실상 추축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했던 이탈리아가 한 편이 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1938년]]에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병합했고]] 같은 해엔 수테텐 지방 병합을 구실로 아예 [[체코슬로바키아]]까지도 [[뮌헨 협정|모두 병합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수상이 평화주의자인데다 독일에 다소 우호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었고 또 이탈리아까지 독일의 편을 들어준 덕에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독일은 이탈리아의 [[쥐트티롤]] 영유권을 인정했고 무솔리니는 그걸 이용해 쥐트티롤의 이탈리아화를 단행했다. 그리고 1939년에 독일은 이탈리아와 [[강철 조약]]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우의를 다졌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이 3국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 동맹을 구상했지만,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는데 왜냐하면 독일이 소련과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어 이 추축국들 사이에서 분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의 문제는 독일이 소련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이탈리아에 통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독소 불가침 조약 방침을 사전에 통보하고 양해를 구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와 [[리벤트로프]]의 독단으로 스탈린과 접촉하고 조약을 맺어버렸으니, 일본과 이탈리아가 크게 당황했다.[* 정작 일본은 소련과 그 해 5월부터 9월까지 [[할힌골 전투]](일본명: 노몬한 전투)라는 국지전을 치르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4월 독자적으로 소일 불가침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그 해 6월에 독일이 소련을 무단으로 침공하면서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독일이야 멋대로 불가침을 맺고 끊고를 반복했지만, 서로간의 주적을 대항하느라 여념없던 소련과 일본은 4년간이 넘게 이 조약을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와중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일각에서 소련의 중재 같은 헛꿈을 꾸고 있는 와중인 8월 8일 소련이 조약을 깨고 [[소일전쟁|일본을 침공해]] 만주국, 몽강국, 식민지 한국 북부를 무너뜨렸고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탈취했다. 이렇듯 독일과 일본은 대 소련 정책에 있어 기막히게도 시기가 엇갈렸고 이는 추축국이 패망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발칸반도]]와 [[아프리카]]를,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 세 나라는 1940년 9월 27일에 [[삼국 동맹 조약]]을 맺어 추축 동맹을 공식적으로 결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