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신군 (문단 편집) == 생애 == 춘신군의 본명은 황헐이며, [[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 밑에서 일하다 [[진(통일왕조)|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사자로 보내져 [[소양왕]]을 설득해 초와 진의 동맹을 결성하는 것에 일조한 대신 후에 고열왕이 될 태자 웅완과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보내지게 되었다. 고열왕의 아버지 경양왕이 병에 걸리자, 소양왕에게 태자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황헐은 웅완을 마부로 위장시켜 초나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소양왕에게 사실을 고했다. 분노한 소양왕은 황헐을 죽이려고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용서했다. 태자는 이미 돌아갔고 이 사람은 태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살아서 돌아가면 중용될테니 차라리 잘 대접해서 돌려 보내주자는 것.[* 황헐이 이렇게까지 한데에는 사실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초회왕은 경민왕의 조부로 재위 말년에 진나라의 제안으로 맹약을 맺으러 갔다가 억류당해 땅을 내놓을 것을 협박당했고 이를 거절하다가 3년 뒤 사망했다. 이미 한번 전례가 있으니 진나라를 못 믿는게 정상이다.] 경양왕 사후 고열왕이 즉위하자, 영윤, 즉 재상에 임명되었다. 그 뒤로 진나라에 맞서 다른 나라와의 연합군을 이끌어 [[조(전국시대)|조나라]]를 구원하고, [[노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활약했다. 이후 합종군의 총지휘권을 맡고 진나라를 쳤으나, 함곡관에서 진군에게 대패하였다. 참고로 함곡관 전투에서 춘신군이 진군의 야습에 겁을 먹고 멋대로 도주하여 합종군이 패배했다는 이야기를 믿고 춘신군을 무슨 [[찌질이]] 마냥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절대 정사의 내용이 아니며''' 단순히 '''소설'''인 《[[열국지]]》의 내용일 뿐이다. 게다가 여기에 덧붙여서 [[이목(전국시대)|이목]]이 춘신군을 탓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 단순한 '''소설'''의 내용일 뿐이며 정사에는 저런 내용이 '''전혀 없다.'''[* 《[[사기(역사책)|사기]]》 <이목 열전>에는 이 함곡관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사에서는 함곡관 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 소양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의 전쟁을 멈추고 반대로 동맹을 성사시킨 데다가, 볼모로 잡힌 태자를 몰래 도망시켰으며, 노나라를 정복하고 초나라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등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아쉽게도 실제 함곡관 전투의 기록이 워낙 부실하여 이 전투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위키피디아에서는 《황성통사》를 참조해 그가 신라로 피난왔던 증조부 경수공 덕분에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보냈었다는 기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중국측 기록인데, 중국에서는 경수공이 한국 황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내려오나 정작 한반도에서 황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황락은 기록에 없어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춘신군이 살던 시대에 신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춘신군은 기원전 244년에 죽었는데 신라는 전신인 [[사로국]]이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57년에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춘신군이 어린 시절을 신라에서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