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추시대 (문단 편집) ==== 주나라의 동천 ==== 기원전 771년, 신후와 견융족 연합군에게 수도인 호경(종주)이 약탈된 후, 주나라 천자는 [[진문후]], [[정무공|정나라의 태자 굴돌]], [[진양공(영성)|진양공]][* 진양공은 이 공으로 제후로 임명된다.], [[위무공]]의 도움을 받아 왕성(성주)[* 낙양 근처]로 천도한다.[* 청화대학장전국죽간 계년에서는 서주의 멸망과 동천에 대해 전혀 다른 역사를 보여준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와 다른 기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자료에서는 유왕이 포사를 취하고 백반을 낳은 뒤 먼저 서신에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서 낳았던 자식인 평왕을 내쫓았다. 평왕이 서신으로 도망치자 유왕이 군사를 일으켜 그곳을 포위했다. 서신 사람들은 평왕을 내주지 않고 증나라 사람들이 서융에 항복하여 유왕을 공격하니 유왕과 백반은 그때 패사했다. 이로써 주나라는 멸망했다. 방군과 제정들이 유왕의 동생 여신을 괵에서 옹립하니 그가 휴혜왕이었다. 휴혜왕이 즉위한 지 21년 만에 진 문후 구가 그를 괵에서 살해했다. 주에 왕이 없게 된 지 9년째 방군, 제후들이 주에 조근하지 않았다. 이에 진 문후가 평왕을 소악에서 맞이하여 경사에서 평왕이 즉위했고, 3년이 지나 동쪽으로 옮겨 성주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유왕의 패사와 주의 동천까지 33년의 시간이 경과되어야 하며 따라서 주의 동천은 기존의 기원전 771년이 아니라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738년의 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민족에게 수도가 약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지킬 힘이 없어 동쪽으로 천도함으로써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게다가 주나라는 본거지를 잃음으로써 전처럼 육사(六師)를 유지한 여력도 없어졌기에 전처럼 제후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가질 수도 없었다. 이로 인해 춘추시대 동안 주나라는 제나라와 진晉나라 같은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연명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