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추시대 (문단 편집) ==== 진문공의 패업 ====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은 [[진헌공]]의 아들로, 이름은 중이(重耳)이다. 본래 진헌공의 후계자는 [[태자 신생]](申生)이었는데, 진헌공이 여희(驪姬)를 총애해 여희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여, 신생을 자살로 몰아갔다. 당시 중이와 중이의 동생인 이오(훗날 [[진혜공]])은 수도가 아니라 바깥에 나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이 본인들마저 죽이려 하자, 모두 외국으로 달아났다. 중이는 적(翟)나라로 달아나 십여 년간 있다가, 동생인 이오가 진(秦)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고 본인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니 적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당시 제나라의 국군은 그 유명한 환공으로, 환공은 공족의 딸을 중이에게 주고 극진한 예우로 대우했다. 중이는 제나라에서 편히 지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는데, 이에 측근인 호언, [[조성자|조최]] 등이 중이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수레에 태워 제나라를 떠난다. 중이는 조(曹), 위(衛)를 거쳐 송(宋)에 도착해 [[송양공]]의 지원을 받아 초(楚)나라로 가고, [[초성왕]]의 도움을 받아 진(秦)으로 간다. 당시 진(秦)은 본인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진(晉)의 혜공이 즉위하기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혜공이 죽기 전 진(秦)에 인질로 있던 혜공의 아들마저 말없이 도망쳐 매우 화낸 상태였기에 중이를 새롭게 진(晉)의 국군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진(秦) 목공의 도움을 받아 중이가 진(晉)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당시 초나라는 제나라도 주춤하겠다 미친 기세로 북진하며, 송나라를 격파하고[* 그 유명한 송양지인 고사가 여기서 유례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진문공이 송(宋)나라를 방문하기 이전이고, 진문공과 송양공이 만났을 때 송양공은 초나라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골골대던 상황이었다.] 조(曹), 위(衛), 정(鄭) 등 중원의 국가를 압박하던 와중이었다. 기원전 632년, 마침내 晉을 비롯해 秦과 齊가 참여한 북방 제후군과 초나라가 성복에서 크게 한판 붙는다. 자세한 내용은 [[성복 전투]]를 참고. 초나라를 대파한 후 진문공은 천토에서 회맹을 주도하니, 이것이 바로 천토회맹이다. 문공의 패업 이후로 중국사에서는 환문(제환공과 진문공)의 행동이라는 것이 천자를 보좌한다는 일종의 관용어가 되었다. 패업을 이룬 지 4년 만인 628년, 진문공은 사망한다. 죽었을 때 나이에 대한 기록이 좌전과 사기가 다른데, 사기에서는 60대 노인으로 나오는 반면 좌전에서는 만 43세에 불과했다. 전한 시대에 편찬된 사기보다 늦어도 전국시대에 완성된 좌전을 더 신뢰한다면, 19년간 방랑하며 고생한 것에 비해 일찍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헌공, 문공이 다져놓은 진나라의 기반은 튼튼했다. 관중과 환공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제나라의 패업과는 달리, 춘추시대 내내 진나라는 북방의 패자로 반楚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다만 진나라도 외형상으로는 그랬지만 내적으로는 진문공의 손자대인 진영공 시기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폭정(진영공)-요절(진성공)-부흥(진경공)-폭정(진여공)-부흥(진도공)-실정(진평공)-요절(진소공) 순으로 이어지다가 진소공 이후 진나라 군주의 실권은 사실상 소멸된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린 기간이 100년은 되긴 하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