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추오패 (문단 편집) == 선정기준 == 이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준들로는 다음의 것들을 꼽을 수 있으며,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1. 천자를 대신해 제후를 소집하여 회맹을 주도하고 여기에서 결정된 내용들을 토대로 당시 국제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가. 1. (이를 위해) 외교력과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군사력을 포함한 강대한 국력을 갖추고 있는가. 1. (이와 같은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패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하고 훌륭한 통치력과 성품을 갖추었는가. 1. (그리고 위 항목들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중원, 즉, (명목상으로) 주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를 운영하고 지켜낼 능력을 갖추었는가.' 이와 같은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환공과 진문공은 이 기준들을 대체적으로 모두 충족시킨 춘추시대 패자의 전형으로 여겨져 춘추오패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없다. 유사하게 초장왕, 진목공 역시 약간의 결격사유를 가진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주왕실을 수호하는 제후의 역할을 수행했는지의 여부 등], 대체적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오왕 합려, 부차, 월왕 구천, 송양공등의 경우는 보기에 따라 위의 군주들에 비해 여러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질 수 있어[* 중원의 제후인지의 문제, 실제 강대한 국력과 외교력을 투사했는가의 문제 등.] 비교적 자주 언급되는 패자들은 아니다. 작위를 패자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백의 위치에 오른 군주들은 주나라 창건이래 [[후작]] 이상이었는데, 예를 들어 진(秦)목공은 후작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문공이나 장왕의 패업보다 한수 아래로 두는 시각도 있다. 물론 초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자작(작위)|자작]]이었지만 실제로는 초성왕 이후부터는 칭왕하였으며, 주변 제후국에서도 이를 사실상 인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월나라와 오나라도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월자와 오자로 각각 칭해였으나, 실제로는 칭왕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춘추오패라는 개념을 통해서 "춘추 시대에는 다섯명의 패자가 있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주요 역사서에서도 춘추오패에 포함시키는 패자가 다르듯이, 춘추시대에는 여러 패자들이 쟁패했던 시기이며, 다섯명을 굳이 뽑는 이유는 음양오행설의 영향이다. 따라서, 춘추오패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춘추오패는 개별 군주를 일컫는 개념으로, 춘추시대 전체는 전반적으로 진(晉)과 남쪽의 초(楚)의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 사실 오와 월의 전쟁도 이 대결의 대리전에 가깝다. 진나라가 필 전투에서 패배 후 전면전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깨닫고 배후의 오를 적극 지원했고 초는 질세라 속국에 가깝던 월을 지원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