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선왕 (문단 편집) == 기타 == * 여성편력이 화려했던 왕이지만 '''[[양성애자]]'''로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의 국왕 중 한 명이다. 충선왕의 동성 연인은 [[원충(고려)]](元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 수도 대도에 머물고 있었던 충선왕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으로 남았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세가 되기도 전에 국성인 왕씨 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기분이 크게 상해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을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으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압록강]]까지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하는데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다. [[역사]]속에서 전제군주의 동성 연인이 뒷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한 짓을 일삼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닌데 원충은 바르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고려 왕조에 충선왕처럼 동성 연애를 한 기록이 남은 임금이 제7대 [[목종(고려)|목종]]과 제31대 [[공민왕]]인데 세 명의 케이스가 조금씩 다르다. 목종은 여자에게 무심하고, 후사도 안 보며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다 동성애에 빠졌던 반면 충선왕은 후사도 보고 후궁도 여럿두며 여성편력이 상당했고 원충 외에는 동성 애인을 둔 기록이 없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일편단심이었고, 이 점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으나 노국대장공주 사후 맛이 가서 여러 음행을 벌인 케이스이다. 케이스가 케이스인 탓에 사실상 왜곡되었거나 부풀려진 기록으로 보고 있다.] *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조선)|효종]]도 [[청나라]]로부터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한자]]까지 고려의 제26대 충선왕과 같다. 다만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시해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만 이걸 쓰고 내부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효종'이라는 [[묘호]]는 청나라 몰래 쓴 것이다. *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충선왕의 이름을 딴 [[도로]]인 '충선로'가 있다. '부평'이라는 지명이 정해진 것이 충선왕 시대라는 걸 감안한 듯 하다. 부평의 본래 지명은 '길주목'이었으나 충선왕 2년(1310년)에 '부평부'로 바꾸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인천'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조선)|태종]] 13년(1413년)부터 사용되었다. * 어진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인데 공민왕 시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들 입장에서 어진은 고가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만일 남아있다면 고려시대 유물이 많은 [[일본]]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전설]]에 따르면 1차 재위 기간 이후 원나라에 끌려갔을 때 어느 [[공녀]] 출신 [[궁녀]]가 [[가야금]]을 타면서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본 꿈을 꿨는데, 이상해서 그 궁녀를 찾았더니 고려에서 살았던 소녀로 [[봉선화]] 물을 들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궁녀는 가야금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며, 그는 궁녀를 생각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오려는 꿈을 키운 결과, 원 무종 카이산이 제위에 오를 때 큰 공을 세운 덕분에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궁녀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불러오려고 했으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선왕은 궁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궁궐에 봉선화를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좋아해서 [[책벌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왕세자 시절 외조부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학문적인 수준을 인정받기도 했고, 원나라에서 지내던 시절 보르지긴씨 [[황족]]들 사이에서 학문에 능하다고 인정받았다. 제4대 원 [[인종(원)|인종]]이 어렸을 적에는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면서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고, 제3대 원 [[무종(원)|무종]] 시절에는 황태제였던 인종의 '태사'가 되어 황태제의 [[스승]]역을 맡기도 했다. 호학 성향 때문에 상왕 시절 [[베이징시|대도]]에 만권당을 세우고, 양국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학문 연구에 힘쓴 것도 유명하다. 이 때 원나라의 높으신 분들께서 고려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자 《[[고려실록]]》을 고려에서 가져와 보여주다가 고려 당국의 항의 때문에 돌려준 일도 있었다.[* 이걸 보면 본인의 정체성이 몽골인이기는 해도 고려계라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고려계와 고려인의 정체성은 엄연히 다르다.][* 이러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차라리 이때 《고려실록》이 중국으로 완전히 반출됐으면 현전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고려인 학자들을 발굴해 원나라에서 활동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제현]][* '''4학사''' 중 한 명인 [[이진]]의 아들이자 [[권부]]의 제자였으며 사위였다.]이 그 중에 한 명이다. 비극적인 [[애산 전투]]로 한족 왕조인 [[남송]]이 멸망한 이후, 원나라로 전파된 [[주자(철학자)|주자]]의 [[성리학]]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처음 전해질 때 만권당을 경유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고려시대 후기와 조선시대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 [[예술]] 감각도 뛰어나서 특히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군주]]답게 여성 관계도 복잡해서 [[정사(역사)|정사]]인 《고려사》도 그렇고 [[야사(역사)|야사]]에도 여성들과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여러가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혼혈 군주이다. * 왕명출납하는 사림원 설치, 각염법, 동성혼 금혼, 정방 폐지를 하였다. * [[경상북도]] [[경산시]]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한 국왕이다. 원래는 장산현이었는데 1310년에 충선왕의 즉위로 [[피휘]]하면서 경산으로 바뀐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