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선왕 (문단 편집) === 즉위하기 전 === 고려 제25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득남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충렬왕이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와 제2비인 [[정화궁주]][* 본래 제1비였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오면서 2비로 밀려났다.] 왕씨의 자리를 동급의 [[서열]]로 두었다가 제국대장공주가 노발대발해서 결국 연회가 [[파토]]나는 [[해프닝]]이 있었다. 2세 때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외가인 [[원나라]]로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외숙모였던 코코친 황태자비가 충선왕을 귀여워하며 '이지르부카'라는 몽골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1277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1278) 원나라에 갔다. 세조 쿠빌라이 칸은 [[늦둥이]] 막내딸에게서 태어난 어린 외손자를 상당히 귀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쿠빌라이 칸이 어린 충선왕에게 "역사상 누가 가장 현명한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충선왕은 "[[고제(전한)|한 고조]]와 [[태종(당)|당 태종]]입니다"라고 답했다. 또 쿠빌라이 칸은 "나, 한 고조, 당 태종 셋 중 누가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생각하느냐"고도 물었는데, 충선왕은 "저는 아직 너무 어려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처음 외손자가 찾아왔을 때는 고려에 대한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며 물었고, 세자 왕원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했다. 이때 "세자는 머리가 좋고 학문도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왕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좋은 왕은 아니었다. 이렇듯 충선왕은 어릴 적에 총명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여 주변인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기대를 받았는데, 이러한 기질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해진 베옷을 입은 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궁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람을 보내 사연을 물었는데, 사실 땔나무 진 사람은 '장작서'의 기인이었고, 형편이 가난하여 베옷을 입은 것뿐이었다. 그것을 들은 세자 왕원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나는 좋은 [[의복]]을 입고 있는데 백성의 형편은 저러하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궁노가 동리 아이들의 [[연]]을 빼앗아다가 세자 왕원에게 바치길래 세자가 정색하고 네가 이 연을 어디서 얻어왔느냐?"라고 묻자 궁노는 우물쭈물하여 동리 아이들에게 빼앗이다고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세자는 궁노를 책망하며,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연을 통해 보면 어릴 적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다. 다른 사례로는 1283년, 9세의 꼬마였던 세자 왕원은 아버지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자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는데 놀란 [[유모]]가 까닭을 묻자 "현재 백성의 생활이 곤궁한데다 농사철이 닥쳐왔는데 아버지는 어찌하여 멀리 사냥을 떠나려하시는가?"라고 하니 측근 신하가 충렬왕에게 그대로 전한 바가 있었다. 9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치고는 제법 성숙한 생각과 발언이라 이 또한 왕원의 총명함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일화는 앞의 두 일화와는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왕원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는 원세조 쿠빌라이칸의 딸인 관계로 자신보다 23살위의 남편이자 한 나라의 왕인 [[충렬왕]]을 마치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충렬왕이 너무 사냥을 즐기느라 나랏일을 소흘히 한다고 생각하며 항상 못마땅해 하던 중, 1282년, 충렬왕이 불을 놓아 사냥을 하다가 백성들의 곡식을 태워버리는 사고가 일아나자, [[제국대장공주]]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사냥만 일삼으니 나랏일이 어찌 되겠느냐?며 [[충렬왕]]을 꾸짖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세자 왕원이 사냥을 나가는 충렬왕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는 이 일화가 1283년의 일인 것을 보면, 어린 세자 왕원이 속상했던 이유는 "아버지는 작년에 엄마한테 야단 맞고서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후일 충선왕이 아버지인 충렬왕과 사이가 안 좋았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제국대장공주]]가 세자 왕원에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 충렬왕에 대해 놀기만 좋아하고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는 한심한 군주라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국대장공주가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사냥만 다냔다고 충렬왕을 꾸짓은 일 말고도, 음악을 좋아하는 충렬왕이 틈만 나면 내관과 악사들에게 연주를 시키자 제국대장공주가 사람을 보내 거문고와 퉁소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며 중단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 1291년 쿠빌라이에게서 특진(特進)·상주국(上柱國)·고려국왕세자(高麗國王世子) 벼슬과 금인(金印)을 받으며 교서를 받는데 여기서 쿠빌라이가 철저하게 충선왕을 자신의 외손이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위치는 원 황실에 의해 확고하게 공인받았다 봐도 과언이 아니겠다. 1296년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제1비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원나라에서 혼인할 대상을 정한 것이었다. 계국대장공주는 훗날 충선왕이 즉위를 도와주는 제3대 [[무종(원)|원 무종]]과 제4대 [[인종(원)|원 인종]]의 사촌이었으며, 제5대 [[영종(원, 5대)|원 영종]]이 시해당한 [[남파의 변]]으로 황제가 되는 제6대 [[진종(원)|원 진종]]의 누나였다. 또한 그녀는 왕원의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의 오빠 [[칭김]] 황태자의 손녀였기 때문에 외가 기준으로 5촌 당조카와 [[결혼]]한 셈이 되었다. 이는 세조 쿠빌라이 칸 사후 황태후가 된 쿠케친의 뜻이 작용한 것으로, 훗날 원나라 황제가 되는 [[태정제|원 진종]]의 아버지인 [[보르지긴 카말라|진왕(晉王)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시킨 것이었다. 진왕 카말라는 칭김 황태자와 황태자비 쿠케친의 장남으로 태조 칭기즈 칸의 황릉이 있는 고비 [[사막]] 북쪽 몽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쿠케친의 3남이자 카말라의 동생이었던 테무르가 [[원성종|원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쿠케친은 세자 왕원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를 고려 왕위가 보장되어 있었던 고려 세자와 인척 관계를 가지도록 배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원나라 인척이기도 한 세자 왕원을 원나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진왕 카말라의 딸과 혼인시키는 것으로 서로 좋은 배경이 되라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자 왕원과 계국대장공주의 결혼은 파탄나다 못해 방해만 되었다. 왕원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 이전에 왕영의 딸[* [[정화궁주]] 왕씨의 조카], 홍문계[* 홍문계는 1270년 제24대 [[원종(고려)|원종]]의 밀명을 받아 송송례와 함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를 살해하고('''경오정변'''), 무신정권 100년의 역사을 종결시킨 인물이었다.]의 딸, 조인규[* [[몽골어]] [[통역]]으로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훗날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조선)|조준]]의 증조부가 된다.]의 [[조비(고려)|딸]]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제27대)의 생모인 의비 예수진과 혼인한 시기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시기보다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이 세자 왕원과 결혼한 고려인 세 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원나라의 반란군인 '''[[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외조부인 세조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년 원나라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오면서 책들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세자 왕원이 고려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왕원은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유를 당시 부왕 [[충렬왕]]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면서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무비#s-5.2|무비]]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무비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실제로 아버지 충렬왕은 왕비인 제국대장공주와의 관계가 나빠서 무비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게다가 흉년이 와서 백성은 굶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큰 돈을 들여 사냥과 연회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제1비인 [[제국대장공주]]는 여러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엄격하고 사리에 밝은 성격인만큼 남편인 충렬왕에게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제국대장공주는 강한 [[자존심]]과 사랑받지 못한 불행 때문인지 투기가 매우 강해서 다른 후궁들과 그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자신이 [[시집]]오기 이전 충렬왕의 정실이었던 [[정화궁주]] 왕씨에게 강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충렬왕은 그런 [[제국대장공주]]의 눈을 피해 무비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더욱 자주 [[사냥]]을 나갔다.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년에 세자 왕원이 23세의 나이로 제26대 고려 국왕으로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