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선왕 (문단 편집) === 즉위와 폐위 === 즉위 직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인 충선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한 폐단을 철폐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측근 세력을 키웠는데 이로 인해 총애를 받은 인물이 [[박전지]], 오한경, 이진, [[권부]]의 '''4학사'''였다. 이후 관제를 [[개혁]]했으며, 무엇보다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만한 [[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충선왕이 [[이자겸의 난]], [[무신정변]]으로 인하여 크게 약화된 고려의 [[왕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혁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무엇보다 충선왕은 [[공민왕]]처럼 원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원나라가 여전히 잘 나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본인의 정체성이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그럴 이유 자체가 없었다.[* 스스로도 '나는 위대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라고 자칭할 정도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니까 니들은 내 말에 따라라!"라고 말했고, 고려 대신들은 "우리가 굳이?"라고 하여 서로 의견 충돌이 발생했으며 [[고려]] 대신들 중 [[원나라|친원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밀어내려는 충선왕에게 반발하며 가만있지 않았다. 그 결과 권문세가의 [[힘]]이 막강해져서 충선왕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정책이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히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가 심해 공주가 그 내용을 원나라 [[황실]]에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이는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맞아들인 [[조비(고려)|고려 여인 조씨]]를 총애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조비를 질투해서 벌인 일로 이른바 '''조비 무고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권문세가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충선왕은 즉위 8개월만에 원나라에 의해 폐위당하고 소환되었다.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아주 폐위하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국대장공주 재가 소동'''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