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선왕 (문단 편집) === 양위 === ||<:> '''[[존호]]''' ||||<(> '''태위왕(太尉王) / 대위왕(大尉王) ''' || || '''고려에서의 지위''' ||<(> 상왕(上王) || || '''별칭''' ||<(> 노심왕(老瀋王) || || '''관저''' ||<(> 연경궁(延慶宮) || || '''상왕 재위기간''' ||<(> 1313 ~ 1325. 05 || 충선왕에게 귀국을 간청하던 신하들은 결국 포기하고, [[광릉군|세자 왕감]]을 고려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는데 충선왕의 심복들이 즉시 이를 대도에 알렸고, 이로 인해 충선왕은 1310년 5월, '''세자 왕감과 그를 추대하고자 했던 김의중을 살해해버렸다.''' 이리하여 새 왕을 추대하는 것마저 어려워지자 신하들은 재차 충선왕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압력에 못 이겨 그제서야 결국 원 인종의 치세였던 1313년, 재위 5년 만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국왕을 양위했다. ~~결국 이럴 거면서 세자는 왜 죽였단 말인가...~~ 이후 충선왕은 대도에 머물면서 [[인종(원)|원 인종]]의 지원으로 원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는 1314년에 '[[만권당]]'(萬卷堂)[* 직역하면 '10,000권의 책을 모은 곳'이란 뜻이 된다. 물론 '만'(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10,000권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책을 모았다는 수사적인 표현에 더 가깝다.]을 설립해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이때 초빙된 학자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있다. 이 와중에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하여 원나라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점차 원나라 내에서도 권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316년에는 부왕 [[충렬왕]]과 제2비 [[정화궁주]] 왕씨의 아들로 충선왕의 이복형인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 [[왕고(고려)|왕고]]에게 심왕 작위를 양위했다. 또한 우승상이 물러나 그 자리가 비워졌을 때, 원 인종이 우승상의 자리를 제안했는데, 충선왕은 자신이 그 자리를 맡기에는 부족하다며 거절했다. 그때 원 인종은 "그대가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권력에서 아주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것을 충선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처지 속에서 아버지 [[충렬왕]]처럼 사냥이나 연회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만권당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불사에 참가하거나 원나라 영역내의 여기저기에 순방을 다녀오곤 했다. 2차례의 즉위와 폐위, 복위를 겪고 아버지 및 아내 [[계국대장공주]]와도 권력다툼을 벌인 그이기에 권력의 무상함만을 절실히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충선왕에게 적대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원 무종과 원 인종의 총애로 눈에 띄는 지위까지 올라간 시점에서 이미 그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특히 자신의 정체성이 원나라의 종친이라도, 혈통주의가 대단한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고려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충선왕은 완전한 몽골인이 결코 될 수 없었다. 말년의 그의 행보는 [[화무십일홍]]을 겪으며 그의 정체성이 [[몽골인]]이 아닌 경계인[* 학술적 용어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말한다'''. [[한국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인 [[재일 조선인]]을 떠올리면 된다.]에 가깝게 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320년 원 인종이 붕어하고, 그의 아들 [[영종(원, 5대)|영종]]이 즉위했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과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티베트|토번]]까지 유배[* 오늘날의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고 해서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고, 제후국 군주까지는 아니어도 꽤 대접을 잘 받았다. 충선왕 본인도 티베트 지역의 토착 문화와 라마 불교에 흥미를 느껴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유배의 목적이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앙 정계에서 추방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다.]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인 원 진종 태정제가 풀어줘 3년 후에 돌아왔다. 하지만 태정제는 누나와 충선왕의 사이가 나빴던 것을 감안하여 충선왕을 중용하지는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충선왕은 원나라 정계에 영원히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만 하다가 1325년 5월에 승하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1세. 후대의 조선 왕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고, 고려는 평균 42세였으니 당시 기준에선 무난하게 살다 간 축이었다.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