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신 (문단 편집) ===== 충의지사 ===== *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 이들 부자 모두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으로 여러가지 전공을 세웠고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는 금산전투에서, 장남인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 부자의 나라에 대한 충심은 유명했다. * [[김상헌(조선)|김상헌]] -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의 대표 주자. 비록 화친과 싸움을 두고 최명길과 대립하였으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두 사람 모두 같았다. * [[김여물]] - 조선 중기 무관으로 임진왜란 시기 신립의 부장으로 충주 사수의 임무를 띠고 파견돼 상관인 신립에게 충주지형의 불리함을 간파하고 의견을 냈으나 신립에 의해 묵살되자 전투의 패배함을 미리 예지하고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유서를 남기고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했다.[* 김여물 본인은 충신이지만 아들인 김류와 손자인 김경징이 온갖 추태를 보여주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성에 금을 냈다.] * [[박승환]] - 구한말 군인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소령]] 계급의 군인이었다. 부하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던 [[참군인]]이었으며 일제의 군대해산 당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해 원통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이 영향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해 [[정미의병]]의 시작점이 된 인물로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 [[사충신]] - '''임진왜란 첫 [[의병장]]'''인 [[송빈]], [[김득기]], [[이대형(1543)|이대형]], [[류식]]을 칭하는 말로 [[김해성 전투]]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김해성 전투]] 책임자인 김해부사 [[서예원]]과 초계군수 이유겸이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 [[삼학사]] * [[송상현]] - 임진왜란의 두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전사 후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의 용기에 감탄하여 정중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추모비를 세웠다. 정발,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원연]] - 개막장인 형 원균, 아버지 원준량과 달리 진위현에서 일본군의 용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상대로 기병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고 연기현감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다 왜군을 막다 장렬히 전사했다. * [[윤흥신]] -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에서 부하들이 몸을 피하라고 권고한 것도 거부한 채 일본군과 싸워 전사했다. 당시 휘하 병력은 불과 800명 수준이었으나, 상대군은 1만 9천여명에 달하였다. 송상현, 정발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정발]] -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성 전투의 지휘관.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맞서싸우다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고, 부산진 주변 백성은 물론 일본군마저 그를 기리는 의미로 흑의장군이라고 불렀다. 송상현, 윤흥신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는다. * [[최경회]] - [[최충]]의 후손이자 의병장으로, 금산과 무주에 승리했으나 진주성에서 패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인물이었다. * [[헤이그 특사]]([[이상설]], [[이위종]], [[이준(열사)|이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