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정왕 (문단 편집) == 생애 == 제28대 [[충혜왕]]의 차남으로 제2비인 [[희비]] 윤씨 소생인데 즉위 전에는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으로 불렸다가 선왕이자 이복형제였던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고려의 제30대 국왕이 되었다. 이때 [[섭정]] 자리를 놓고 충혜왕의 제1비 [[덕녕공주]]와 희비 윤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졌는데 덕녕공주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 달리 충혜왕이 첫 혼인으로 맞은 부인[* 제25대 [[충렬왕]]부터 제27대 [[충숙왕]]까지는 모두 다른 비를 들인 상태에서 원나라 공주를 제1비로 들였다. 제28대 충혜왕과 제31대 [[공민왕]]만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혼인한 적이 없었다.]에다가 원나라 황족이기까지 했으므로 자연스레 섭정은 덕녕공주가 하게 되었다. 그러다 충정왕 2년인 1350년 덕녕공주가 원나라로 떠나면서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공민왕 치세때 다시 고려로 귀국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선왕인 충목왕이 영리했다고는하나 연달아 어린 임금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기부터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심해졌고[* 그나마 충목왕때는 덕녕공주가 섭정했기에 [[권문세족]]들을 견제라도 할 수 있었지만, 충정왕 즉위 이후에는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다시 날뛰기 시작한 듯 하다. 충정왕때 [[권력]]을 남용한 대표적인 인물이 희비 윤씨의 오빠인 윤시우였다. 그는 어린 왕의 외숙부라는 명분으로 인사권을 휘둘렀고, 공공연한 비리를 저질렀는데 충정왕이 폐위당한 뒤 [[이제현]]에 의해 유배되었고 이후 [[제주도]] 순문사로 기용되었으나 토착 세력들의 반발인 [[목호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나마 [[개혁]]을 했다던 덕녕공주도 자기 친위 세력의 전횡에는 눈을 감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충목왕 시대의 한계점이라면 한계점이었다.]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는데, 더 큰 문제는 안으로만 혼잡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꽤 어지러웠다는 것이다.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더라도 원나라마저 혼란기에 접어든 무렵이었고, 특히 [[일본]] 열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2명의 [[천황]]이 대립하는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의 혼란기가 와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 남북조시대 초기에는 그랬다. 발호한 [[왜구]]들이 [[한반도]]와 [[중국]] 동부 해안을 약탈하면서 재미를 보기 시작하자 남북조는 이들을 고용하게 되었고, 심지어 규슈가 중심지가 되었는데 열세였던 남조 측에서 직접 정규군을 이끌고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되고 말았다. 이 틈을 타 세력이 커진 왜구의 침입이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졌으며, 특히 1350년 무렵 이들의 침략과 약탈 등이 100여 회가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활동을 벌였는데 아예 이 해의 간지를 따서 '''경인왜구'''(庚寅倭寇)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렇듯 고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자 고려 내부에서는 어린 임금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니 그를 교체하여 국면의 전환을 노려보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충목왕이 승하했을 때 충정왕과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로 꼽혔으며, 충정왕과는 다르게 이미 장성한 나이였던 강릉대군 [[공민왕|왕기]][* 제27대 충숙왕과 [[명덕태후|공원왕후]] 홍씨 사이의 2남이며, 제28대 충혜왕의 동생인 동시에 제30대 충정왕에게는 숙부가 된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급기야 윤택, 이승로를 중심으로 하여 도당에서 정식으로 원나라에 요청한 후, 고려 국왕 교체가 전격 결정되었고 이에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 숙부 강릉대군이 임금이 되자 폐주 충정왕은 향년 16세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았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공민왕이 독살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유명무실한 자리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쿠데타]]처럼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 기관에서 국왕의 폐위를 의결하여 상국의 재가를 받아 집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무신정권]] 시기의 고려 국왕보다도 더 허약한 허수아비 자리였음을 증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