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청북도청 (문단 편집) === 동헌 시절 === 도 관찰사가 시도 관할하던 전통이 이때까지 있었는지는 몰라도 청주목에서 쓰던 청녕각(淸寧閣)[* 본래 1656년(효종 7) 5월 24일 목사 심황이 초창했으며, 이후 1732년(영조 8) 목사 이병정이 중수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72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청녕각]]).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近民軒)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李德洙)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2_1_0&ccbaCpno=2113301090000|문화재청 - 청녕각]]][*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청주목사 이덕수가 1825년 개축했다고 되어있으나 1868년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또다시 등장한다. 40년간 같은 사람이 목사일 리는 없으니 동명이인이거나 어느 한 자료가 틀린 듯하다.]을 이어서 도청으로 쓴 듯싶다. [[http://cheongju.grandculture.net/Contents/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0202425&isTreeSpread=Y&RequestBy=%ED%95%AD%EB%AA%A9%EB%A7%81%ED%81%AC|디지털청주문화대전 - 청주를 에두르며 방어하던 청주읍성]] 이 건물을 쓰던 시절 건물을 증축했던 도면이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다.[[http://theme.archives.go.kr/next/place/govLoaclAdmin.do;jsessionid=mmpX9cxhvSDDzIqS4zq4kHhX4uVggwm0a3bsOr6FSnAE9kGdUowtb7S0lHUaNQsh.CW-MOBILE_servlet_engine1?flag=3|#]] [[파일:DC_b16dVwAA5Lup.jpg|width=300px]] 오늘날 청주시청 제2청사(구 [[청원군]]청) 뒤에 있는데 청원군청과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것이 꽤 기묘하다. 콘크리트로 개조되었으며 청원군청 군청사의 일부로 사용하기도 했다. [[http://www.doopedia.co.kr/mo/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2&MAS_IDX=101013000776395|개조 당시의 모습]] 아무리 봐도 문화재로 보존해두는 느낌은 아니었다. 콘크리트로 개조되어있던 것은 2007년 목조 양식으로 [[복원]]하였다.[[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745|#]] 198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청녕각이라는 편액(扁額)[* 건물의 이름을 나타내는 액자]은 중앙공원의 병마절도사 영문으로 이동했다가 1988년 11월에 다시 옮겨왔다. 본래 동헌 건물이 청녕각인 걸 다들 잊어버리고 병마절도사 영문이 청녕각인 줄로 알고 있었다가 뒤늦게 동헌 건물이 청녕각이라는 사실이 다시 알려졌다. [[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53|충북inNEWS]] 이후 2007년 복원 과정에서 상량문(上樑文)[* 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 '상량')에 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까닭과 공역(工役)한 날짜, 시간 등을 적은 글. 일반 가옥에서는 마루에서 올려다 보이지만 공공건물에서는 가려져 보이지 않게 한다.]이 발견되면서(위 개조 당시의 모습 링크) 청녕각이라는 것이 다시금 확실해졌다. 동헌이 도청으로 쓰였다는 것은 '청녕각'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한 것이다. 위 기사에서도 보면, 앞서 이야기한 청주연혁지에서 청주로 관찰부를 옮기는 이야기를 하면서 "청주에 28칸 관아 건물이 있어서 옮겨도 청사가 부족하지는 않다"(37쪽)[* 이전은 1908년에 이루어졌으니 1923년 간행된 청주연혁지의 저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이전 당시 조선통감부 서기관이었던 카미야 타쿠오(神谷卓男)가 [[조선통감부]] 내무차관(内務次官)에게 보낸 글을 인용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마침 7*4 = 28칸인 청녕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헌 = 청녕각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어서 그런지 동헌 건물이 도청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웹에서 찾기가 어렵다. 만약 이것이 맞는다면 1928년에 이전했을 때에는 약 200m 정도 남쪽으로 옮긴 것이 된다. 한편 아래 도청 본관 링크에서는 1908년 이전 직후부터 도청 청사가 중앙공원에 소재해있었다고 되어있어 차이가 난다. 150년 전에 시청으로 쓰였던 건물이 약 20년간 도청으로 쓰였고 오늘날까지 남아있으니 지방 도시로서는 꽤 잘 보존된 셈이다. 다만, 도청 주변을 이루고 있던 청주읍성은 1911년 철거되어 크게 훼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