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취추바이 (문단 편집) === 문혁 시기의 격하와 복권 === 1964년,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에 의해 변절자로 몰렸다. 위에서 언급한 자서전에 대한 비판이 공개된 것은 강소성에 있는 그의 생가가 관람객을 받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생가는 문을 닫았고, 1967년에는 [[홍위병]]들이 몰려와 팔보산 혁명공묘에 있던 그의 조각상을 부수고 무덤을 파헤쳤다. 이 와중에 그의 양친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 1976년 문혁이 끝나고 [[4인방]]이 타도된 직후 아내 양지화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중공 중앙에 재평가(평반)를 청원하였다. 1979년,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공중기위)는 취추바이 문제를 재심하는 임시 기구를 꾸려 조사를 시작하였다. 1980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당시 중공중기위 제3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의장으로 임하여 열린 중공중기위 제2차 전체회의에서 ⟨류사오치, 취추바이 동지의 복권 및 평반보고(关于刘少奇、瞿秋白同志的复查平反报告)⟩ 문건을 동년 2월의 중공 11기 5중전회에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3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공 11기 5중전회에서는 [[류사오치]]의 복권만 심의하였으나 이 때 취추바이도 사실상 함께 평반, 복권된다. 1982년 9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 제출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업무보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취추바이 동지가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된 후 소위 '자수하고 전향하였다는' 문제에 대하여 새롭게 조사하였습니다. 취추바이 동지는 우리 당의 초기 저명한 영도자들 중 한명이었기에 당 내외에서 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그의 체포 전후에 대해 사실적으로 조사하여, 취추바이 동지가 체포 이후 불요불굴하는 투쟁을 견지하였기에 그로 인해 적에게 살해당했음을 밝혔습니다. 이 시점에서야 취추바이는 완전히 복권되었다. 2009년 9월 10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중앙통일전선부, 중앙문헌연구실, 중앙당사연구실,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 인력자원사회보장부, 전국총공회,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중앙위원회, 전국부녀연합회,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조직들이 뽑은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과 100인의 신중국성립이래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들'중 '100인의 신중국성립에 있어 놀라운 공헌이 있는 영웅적 모범인물'중 한 명으로 뽑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