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숙청]]의 불가피론 ====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청나라]]의 제5대 세종 [[옹정제]]처럼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 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하여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매력없고 잔혹하며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고,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군주들이 등장하면 그 뒤에 반동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가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군주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이후의 몰락이 오가게 되는데 당현종은 자기 대에 성세인 개원지치와 난세인 천보난치가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사실 현종도 측천무후의 손자가 아니랄까봐 자신의 반대파였던 큰어머니 위황후와 [[사촌]]인 [[안락공주]]를 위시한 위씨 일족, 할머니의 무씨 일족, 고모인 [[태평공주]]와 그녀의 세력을 싹 숙청한 전례가 있어 마냥 너그럽고 인자한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당제국의 사실상의 창건자가 태종이고, 고종 시절부터 무후가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인 당제국의 제3대 황제가 된다. [[조선]]의 경우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가 [[창업군주]], [[조선 정종|정종]] 이방과를 징검다리라고 치면 실질적으로는 제2대째인 [[태종(조선)|태종]]이 숙청과 [[사병]] 철폐 등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고 제3대째인 [[세종대왕]]이 조선의 기틀을 잡은 것이 된다. 반면 [[수문제]]는 제1대 황제로서 굉장한 업적을 이룩하고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제2대 [[수양제]]가 나라를 말아먹어서 박살난 것을 생각해보면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에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나 태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 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의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에야 절대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는 700년 즈음으로 무후 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붕어한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 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를 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