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초기 === [[고조(당)|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던 [[태원]]군공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 제일 높은 품계인 귀비를 포함한 19개의 후궁 품계 중 밑에서 네 번째인 품계인데, 당시 입궁을 앞둔 측천무후의 어머니는 딸이 받은 품계가 낮은 것을 한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 무씨 성의 예쁜이]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는데,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말]]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했다. 태종이 방법을 묻자 >* [[철편]][* 문서에도 설명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 채찍이 아니라 대나무 모양으로 벼린 쇠막대이다.]으로 때려서 기를 죽인다. >*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퇴(무기)|철추]]로 후려친다. >*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찌른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태종이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라고 하자, 무재인은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이는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음을 은근히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지만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당)|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무재인과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내세웠다. 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장안 인근의 감업사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 이치의 명령으로 정2품 '''소의'''(昭儀)[* 이전 품계였던 재인(才人)에서 '''무려 11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정2품 소의에서 무품이자 [[황후]]의 바로 아랫자리인 귀비까지 총 3명의 비(숙비, 현비, 덕비)만 존재할 뿐이었다.]로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했다. [[태종(당)|당태종]]의 [[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고종(당)|당고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과 [[한족]]의 [[무천진 관롱집단|혼혈]]이라 북방 유목[[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첩]]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거나 [[형사취수제]]를 함이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역사책)|사기]]》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전쟁]]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 이라고 설명했는데 그냥 여자를 [[가축]]과 같은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하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다 보니 부자, 형제간 상속 내지 양도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방 유목민족의 이러한 풍습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오는 재산 때문이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여성의 [[재혼]]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내놔야 했으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막기 위하여 생긴 일이었다. 비슷한 예로 [[칭기즈칸]]은 정실 [[보르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복된 [[부족]] 여성들을 첩으로 삼았는데 칭기즈칸 붕어시 이들 중 일부에게 약간의 재산을 상속해주었을 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이들을 첩으로 삼았다는 말이 없다. 또 유목민은 반대로 여권이 상대적으로 좋기도 했다. 예시로 [[백등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한고조 유방에게, 흉노의 묵돌 선우는 여자에 약하다며 묵돌의 연지(부인)를 설득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정작 묵돌은 자기 애첩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린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묵돌이 여자에 약하다는 것은 흉노 사회가 여권이 상당히 높았고, 때문에 묵돌 역시도 여자(부인)의 말을 아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훗날 [[현종(당)|당현종]] 이융기도 자기 아들인 수왕의 여자였던 [[양귀비]]를 [[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았다. [[태종(당)|당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해 [[고종(당)|당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양귀비|양옥환]]의 경우에는 도교에 출가하면 이전의 모든 행적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을 활용한 측면이 크지만 측천무후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 [[세탁]]을 할 목적으로 [[절(불교)|절]]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선황의 후궁들 중 자녀가 없는 사람이 절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