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 ===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 이것도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데, 통괄적으로 당고종의 생을 보면 아비였던 태종 이세민에 비하여 정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이세민이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었다. 또한 왕황후의 경우, [[무천진 관롱집단]]의 지지속에 황후에 오른 사람으로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측천이 쫓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 시기까지 무측천은 황제였던 고종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지지자였을 경우가 더 높다고 봐야한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였다. 이세적은 농민 출신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 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당나라)|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당)|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십팔사략]]》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당의종(추존)|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당시 기록에서 태자 이홍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무측천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무능한 3남 중종 이현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자기 소생 아들을 죽인다고 다음 후계자로 지명되는 사람이 또 다시 자기 소생이 된다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후 자신의 차남인 '''[[장회태자|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680년]]에 어머니의 숙청에 불만을 품자 폐위되었다. 무후는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중종(당)|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당)|고종]]이 붕어한(683) 이후 황태자 이현(李顯)이 [[중종(당)|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양위|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라는 초대형 헛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자른 건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684)[* 배염은 무측천의 반대파 사람으로 훗날 무측천에게 제거될 정도였으니 비밀리에 이를 꾸몄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중종의 이 발언이 얼마나 정신나간 헛소리인지는 [[중종(당)|중종]] 문서 참조.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예종(당)|당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반란이다'''.[*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이적의 집안은 거의 박살이 나서 후손 중에는 [[토번]]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업 자신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려]](옛 [[고구려]]땅, [[신라]]일 수도 있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경업의 난을 평정할 때 나섰던 장군 중에는 [[백제]] 유민 출신의 번장 [[흑치상지]]도 있었다.]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황위를 넘겨받아[*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 국호를 [[무주(당나라)|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시안시|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역성혁명|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고대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드디어 남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로 [[여제|여성 황제]]의 시대가 출현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