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셰위안 (문단 편집) === 매국과 죽음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941년제섭원.jpg|width=100%]]}}} || || 1941년의 치셰위안 || 1935년 [[기동사변]]이 일어난 이후 성립된 기찰정무위원회 정무위원에 임명되었고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7월 14일 [[쑹저위안]]의 대리로 장즈중, 진각생과 함께 일본군 화북주둔군 참모장 하시모토와 회담하여 29군의 즉각적 철병, 항일분자 단속, 해당 대대장 처벌에 동의하였고, 베이핑 시장 친더춘이 일본군에게 직접 사과했으나 [[무타구치 렌야]]를 비롯한 일본군의 과격파 장교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사소한 충돌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치셰위안은 초기에는 쑹저위안의 부탁을 받고 [[루거우차오 사건]]의 협상을 맡기 위해 일본군과의 교섭에 들어갔으나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된 이후 [[일본군]]에 투항하여 [[왕커민]], 왕읍당, 왕음태, 주심, 탕이화 등과 함께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임시정부 상무위원, 의정위원회 위원, 치안총장을 지냈다. 왕커민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화북 치안을 이유로 화북치안군이 증강되자 이를 기반으로 왕읍당과 힘을 합쳐 왕커민 추방을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치셰위안은 왕읍당과도 크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중화민국임시정부수립.jpg|width=100%]]}}} || ||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선포를 알리는 괴뢰인사들, 왼쪽에서부터 [[가오릉웨이]], 치셰위안, [[왕커민]], 강조종, 동강, 탕이화, 왕읍당 || [[왕징웨이 공작]]으로 [[왕징웨이]]가 일본에 포섭되어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된 이후 화북 정무위원회 치안총서독판, 화북수정군총사령관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나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인루겅]], 왕음태 등 화북의 주요 한간들과 함께 1946년 5월, 난징으로 압송되었다. 1946년 12월 18일, 난징 우화대 형장에서 반역죄로 총살당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치셰위안이 처형당하기 직전.jpg|width=100%]]}}} || || [[https://kuaibao.qq.com/s/20180531A0EW7M00?refer=spider|처형당하기 일보 직전의]] 치셰위안.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