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친이 (문단 편집) ====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선출 ====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당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친이계는, 이후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여 대표최고위원을 배출하기 위해 움직인다. 당초 친이계는 [[이재오]]를 내세우려고 했으나, 이재오가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하여 크게 내상을 입는 바람에 다른 중진을 찾게된다. 결국 친이계는 비록 이명박, 이재오와 함께 친이 6인회에 속했지만, 고령으로 인해 공천에서 컷오프됐던 [[박희태]]를 당대표 후보로 밀게 되었다. 이 때 당대표로 나선 박희태의 선거조직은, 마치 지난해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인적 중복 현상을 보였다. 좌장격인 [[최병국(1942)|최병국]]을 중심으로, 친이계 내에서도 이재오계의 핵심인 [[안경률]]이 총괄본부장을 맡았고, 대선 당시 경선대책위 부위원장이었던 [[정의화]]와 경기지역 선대위원장 역할을 했던 [[고흥길]]이 고문을 맡았다. 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 그룹으로 꼽히는 안국포럼 출신의 [[백성운]], [[김효재]]는 각각 조직과 메시지를 전담했다. 참고로 [[백성운]]은 대선 경선 당시 종합행정실장을 맡았었다.또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의 '입'으로 활동했던 [[진수희]]와 경기지역을 담당했던 [[차명진]]이 박희태 캠프의 공보 일을 전담하다시피했다. 각 지역을 총괄하는 인사들 또한 서울의 [[장광근]], 경기도의 [[원유철]], 대구 [[주호영]], 부산의 [[김정훈(1957)|김정훈]], 울산의 [[김기현(정치인)|김기현]], 강원도의 [[허천]], 충남의 [[홍문표]], 경북의 [[이병석(정치인)|이병석]], 경남의 [[김재경(1961)|김재경]] 등 대선 시절 이명박 경선대책위 주요 인사들과 겹쳤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2151268?sid=001|#]] 결국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희태가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마지막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던 친이계와 청와대 관계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됐다는 표정이었다. 고소영ㆍ강부자 내각 논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총선]] 압승 실패, [[광우병 논란|쇠고기 협상 파문]] 등으로 그동안 '액션 플랜'이 꼬일 대로 꼬였던 여권이 궤도를 이탈했다가 제 선로를 찾은 것이다. 상단에서 말했듯이, 박희태를 첫 여당 대표로 만들기 위해 이상득계ㆍ이재오계ㆍ친이 직계를 아우르는 친이계가 총출동했다. 또 다른 친이 인사인 [[공성진]]이 6월 17일 여의도 대하빌딩 9층에 사무실 개소식을 할 때만 해도, 공성진 측은 "1등도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다. 친이재오계가 조직력을 가동하면 박희태 측도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하지만 이 같은 기세는 개소식 이후 며칠 가지 못했다. 박희태 진영과 이재오계 당협위원장들이 공동으로 박ㆍ공 공동캠프를 차렸다. 대하빌딩 4층에 박희태 후보 사무실이, 같은 빌딩 9층에 공성진 후보 사무실이 있지만 같은 빌딩 2층에 박·공 공동 캠프가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는 '1순위 박희태ㆍ2순위 공성진'이라는 카드를 마련했다. 공성진은 4등으로 겨우 최고위원이 됐다. 공성진 측은 "사실 박 대표를 만들기 위해 공 의원이 희생한 감이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재오계 [[안경률]]은 박희태 캠프에서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또 안경률이 나서서 친이계와 청와대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했다는 고 한다. 6월 30일 친이계의 대거 회동에도 안경률이 역할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전당대회 한 주 전까지 계속 1위를 노리던 [[정몽준]] 측의 기세가 친이계의 대거 회동 시도를 계기로 급전직하했다고 판단했다. 대의원의 표심이 급격히 정 후보 측에서 떨어져 나와 박 대표 측으로 붙었다는 것이다. 공성진 측은 "친박 쪽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사실은 정몽준 측을 견제하려던 것"이라면서 "모임이 몇 시간 전에 취소되긴 했지만, 성사된 것과 동일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전당대회 마지막 주부터 모든 시나리오는 친이계의 뜻대로 맞아떨어졌다. 전당대회를 바로 앞두고 이미 '박희태-정몽준-허태열-공성진'이라는 순위 결과가 점쳐졌다. 투표가 진행 중일 때 친이 소장파 [[권택기]]는 "박 대표와 정 후보가 각각 1ㆍ2등을 하고, 3ㆍ4ㆍ5등은 1ㆍ2등과 좀 차이가 날 것"이라면서 "허 후보가 조직력에서 앞서지만 정 후보가 일반인 여론조사에서 휠씬 앞서 2등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는 전망 그대로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볼 경우, 2008년 전당대회 결과, 친이계는 박희태, 공성진, [[박순자]]까지 3명의 최고위원이 지도부에 들어갔다. 지명직 2명을 포함하면 5명의 최고위원이 친이계열로 분류되었다. 여기에다 당시 원내대표 [[홍준표]]와 정책위 의장 [[임태희]]까지 가세해 지도부 9명 중 친이계가 7명이나 된다. 정몽준까지 친이로 분류하면 8명이 된다. [[허태열]]만 친박계 인사로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박희태 대표 체제에 대해 [[이혜훈]]은 “화합을 내세우는 분이라 잘 할 것”이라면서도, 친박 인사들과 화합 가능성을 묻자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명박과 가까운 박희태가 당 지도부를 이끌게 됨에 따라, 향후 청와대 친정 체제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공공연하게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희태는 취임 후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친이계 역시 외부의 시각과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조해진]]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을 좌지우지한다고 할 수 있냐”면서 “정치를 잘 아는 박 대표가 당이 중심이 되도록 잘 이끌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오계 [[김용태(1968)|김용태]] 역시 "대통령 자신이 정치를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면서 "박 대표가 백전노장이라 정치를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김용태는 “박 대표가 우선 사람들을 두루 만나 화합의 통로를 열어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3/0000014595?sid=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