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정산 (문단 편집) == 기타 ==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관측함은 천자만의 특권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임금으로서 정당성을 부여받고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독자적인 역법을 만드는 행위는 중국 황제가 천명을 받았음을 부정하는 의도로 보일 수 있었다. 당연히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면 외교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선조(조선)|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연합군이 조선으로 들어오자 선조는 독자적으로 칠정산을 사용함이 들킬까 봐 매우 우려했다. 그리하여 "제후국에 두 가지 역서가 있으니 매우 떳떳치 못한 일이다. 대국을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라며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함을 금지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명은 조선의 칠정산에 대해서 먼저 외교적 압박을 가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명이 발표한 역서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한양을 기준점으로 삼아 칠정산이라는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어 시행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를 빌미로 명이 공식적으로 압력을 가한 적은 없다. 다만 추측하건데 정말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조선이 명나라의 대표적인 제후국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조정에선 명나라와 [[제3차 요동정벌|요동정벌]]로 갈등이 있던 극초기를 제외하곤 조선의 상황에 어두웠다. 얼마나 조선에 대해 어두웠는지 [[계유정난]], [[중종반정]] 등등 명나라에서 직접 책봉받은 조선의 왕을 폐위시킬 때 조선 조정에선 명나라에 거짓말로 상황보고를 했음에도 명나라는 거짓을 알아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첩자 한 명만 조선 정치판에 풀어놔도 뻔히 알 수 있던 거짓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효종(조선)|효종]] 4년(1653)에 이 금지를 냅다 풀고,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하던 [[시헌력]]을 조선 기준에 맞추어 자체적으로 달력을 제작하였다. [[육십갑자]]의 원년 즉, [[갑자]]년이 칠정산 편찬년도부터 시작한다. [[분류:조선의 천문서]] [[분류:조선왕조실록]] [[분류:역법]] [[분류:규장각 소장품]] [[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