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종칠금 (문단 편집) === 남만인들은 [[야만족]]이었나? ===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부터 각종 만화, 애니메이션 등 삼국지를 다룬 매체에서는 제갈량의 남중정벌 당시 촉군이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정글]] 같은 지역을 돌파하며 중요부위만 가린 반라의 전사들과 싸우고, 축융부인 같은 여캐는 --판매를 위해-- 과감한 노출패션을 하고 있으며, 맹획은 깃털 및 나뭇잎 장식을 하고 있는 등 완전히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석기시대 수준의 부족사회 원주민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남중정벌 전역에서 역사상 이름을 올리게 된 남만측 각 인물들의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그 상당수는 이미 한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의 지방정권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거나, 맹획처럼 아예 한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이미 한나라의 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남중정벌의 무대가 되는 운남지역은 멀리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의 진나라의 정벌이 있기도 하였고, 통일 진나라 시기에도 몇 차례 정벌이 있었다. 본격적인 중국세력의 확장은 기원전 109년, 곽창이 한무제의 명에 따라 익주군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해당 지역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으면서 이미 후한대에 이르르면 이미 [[청동기]]를 지나 철기시대로 넘어간 상황이었으며 그에 수반 된 사회적 변화의 흔적 또한 발굴, 관측이 된다. 따라서, 해당 지역이 한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부족"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부족"이라는 게 아프리카 정글의 석기시대 수준 원주민들이 팬티한장만 달랑 걸치고 [[우가우가]]하던 그런 시절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 (비슷한 시기 한반도의 부족국가들이 "부족국가"라고 해서 야만족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럽이나 중국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명권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는 지역이 아닌지라 상당히 인지도가 낮지만, 실제로는 운남지역의 고대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꽤 오래동안 진행되어 왔다. 제갈량의 남중정벌의 무대가 되는 지역들은 기원전 1세기 한의 익주군의 설치 전까지는 '''뎬(Diān[滇(전)]) 문화'''로 알려진, '''고도로 발전된 청동기 문명권이었다.''' 실제로 남중 각지에서 발굴 및 출토되는 한나라 전 시기 청동기 유물들은 매우 수준이 높은 것들이며, 부장품 등에서 묘사되어 있는 뎬 민족의 의상은 당연히 '''팬티 한 장이 아니다.''' --아쉽지만 여캐들도 허벅지 드러내고 다니지 않았다-- 이미 기원전 5세기~1세기 시점에 상당히 발전 된 청동기 문명이 들어서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남중정벌이 발생하는 '''기원후''' 225년이면 익주군이 설치 된 이래 중국문화가 해당 지역에 침투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300년이 넘는''' 시점이다. 해당 시점의 남중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주나라 이래 분봉을 통해 중국의 세력이 오지에 진출하여 식민화를 이루는 과정, 그리고 소위 '야만'지역에 대제국이 진출하여 식민화를 이루던 여타 역사적 사례들을 미루어 짐작할 때 3세기의 남중은 [[갈리아 전쟁|카이사르의 정벌]] 이래 로마에 편입되어가던 1~2세기 [[갈리아]]의 상황과 비슷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도시, 군사적 주둔지 등 주요 거점을 중심부로 하여 그 주변에는 상당부분 건축물, 관아 및 행정부의 설치 등 분야에서 한나라의 양식이 침투해있었을 것이며, 그런 지역의 주민들은 한의 복장, 생활양식, 예법을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해당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아직 융화가 미진했던 부족들의 지배지역에서는 한나라의 색이 점점 옅어졌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의 조직, 관습, 문화, 생활상과 멀어지면서 반대로 해당 지역의 특색, 부족들과 역으로 융화가 진행되던 한족들이 뒤섞여있는 공간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제갈량이 남긴 일부 편지 등 문서들을 근거로 여전히 문신하고 벌거벗고 다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그러한 편지를 쓰고 기록을 남긴 시점에 제갈량이 실제로 남중까지 가 본 일이 없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초목이 빽빽히 우거지고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오지에 벌거벗고 문신한 야만인들이 그득하다는 식의 서술은 해당 시기의 남중보다는 오히려 기원전 5~6세기,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만족의 모습이라고 알려진 것에 더 가까운데, 이는 '''제갈량 시절로부터 700년 전의 만족의 모습이다.''' 즉, 춘추전국 시대의 장강 이남 만족과 제갈량의 시절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현대 한국인들과 조선왕조의 수립 시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만큼이나 크다. 즉, 해당 편지를 보낼 때 제갈량이 객관적 사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문인들의 전형적인 화법에 따라) 옛 시대의 고전에서 인용, 레퍼런스를 따와서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3세기의 남중지역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면, 한나라 중앙과의 연결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오래동안 계속되면서 완전히 군/현 단위에서 한의 행정력에 예속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정권과 유착한 부족들은 한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유착관계가 없었던 다른 부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색채의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지의 한족들은 점차 호족, 토호화 되면서 지방 부족의 유력자들과 유착하여 반독립 상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나라와 남만의 모습이 뒤섞인 상태로 파악할 수 있다. (지역 내의 이러한 다양한 색채는 제국의 정 반대편, 먼 동북쪽의 [[낙랑군]]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남아있는 유물이 없어서 쉽지는 않지만, 남만의 군사적인 모습 또한 어느 정도는 추측이 가능하다. 일단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초기에 이르는 양식의 갑옷의 파편 등은 확인이 된 상태이며, '''특히 앞서 언급한 뎬 문화권(기원전 5~1세기)의 예술품에서는 고대 한반도, 일본의 단갑, 판갑양식과 굉장히 유사한 형태의 갑옷을 갖춘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Dian_Kingdom#/media/File:%E9%8E%8F%E9%87%91%E6%8E%B3%E6%8E%A0%E9%93%9C%E6%89%A3%E9%A5%B0.jpg]] '''* (영문 위키피디아 "Dian Kingdom" 항목에 등재되어 있는 뎬 청동장식의 사진.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국 삼국시대 초기의 갑옷과 굉장히 유사히다)''' 이 지역의 갑옷 양식의 발전상만 유독 특이한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철기시대가 진행되면서 기술력의 발전과 함께 단갑, 판갑의 양식이 찰갑 양식으로 바뀌어가는 일반적인 코스를 (중국 본토, 한반도, 일본 모두 비슷한 변화를 겪은 바 있다) 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찰갑 유물들이 발견이 되고 있다. 다만, 아직 완전한 한 벌이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얼개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대체로, 한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지역에서는 한나라의 양식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 부족들의 경우에도 역시 (정확한 형태를 추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나라 양식의 찰갑과의 차이점을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찰갑이 가장 보편적인 갑옷의 양식인 듯 하다. 그 외 운남 지역에서 발견 되된 갑옷 유물 중에는 (일본의 오요로이 양식과 유사해보이는) 대리국의 갑옷이라든가, 옻칠을 한 가죽제 갑옷 등도 있으나, 이는 모두 삼국시대를 한참 지난 중세의 것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당시의 운남 갑옷과 직접적인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칠종칠금"의 모델이 된 실제 남중정벌에서 제갈량이 만난 것은 빽빽한 정글에서 반라의 상태로 게릴라전을 하는 --콩키스타도르와 싸우던 잉카 전사들 같은-- 석기시대 야만용사들이 아니라[* 사실 연의 기준으로도 남만 부대가 강철 작살을 사용했다거나 양봉의 군사가 철갑을 입었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남만인들은 철기 문명이다. 애초에 나관중 시대에 제대로 된 고고학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석기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넓은 운남 분지의 주요 거점들에서 지연전,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을 잘 무장한 남만의 군대였을 것이다. 지역에서 관부의 병사로 있다가 반란에 동참한 정규군 출신의 정예병들은 완벽하게 한나라식 철제 찰갑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외 대다수를 이루었을 일반 부족 병사들은 주요 부위에 금속제 찰갑을 덧댄 보다 경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타 잡병들이나 궁병 등은 갑옷을 갖추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운남지역의 전통적인 장옷'''을 단단히 동여맨 차림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남만인들은: > (1) 이미 한나라의 익주군 설치 이전부터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이루고 있었으며 > (2) 익주군 설치 이후로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였고 > (3)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모두 한나라의 지방정권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나라의 행정, 군사제도 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옛 협조자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