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칭하이성 (문단 편집) == 민족 갈등 ==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족과 [[이슬람교]]를 믿는 [[후이족]]이 같이 사는데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제법 심하다. 후이족과 티베트족 간 갈등은 매우 역사가 긴데, 중앙아시아와 인도 불교가 이슬람의 공세로 쇠퇴하던 시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는 직접 이슬람과 대치하던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8세기 당시 신장 지역 서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슬림들이 정복하여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나, 신장 지역의 경우 [[토번 제국]]이 무슬림들의 진공을 저지했고 이로 인해 위구르인들이 완전히 이슬람화하는 시점은 14~15세기로 늦춰졌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무슬림 [[살라르족]]을 이 지역 동부에 주둔시켜 티베트계 부족들을 견제했던 바 있다.[* 여담으로 18세기 말까지 현재의 신장 위구르 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티베트 불교를 믿던 [[준가르]]부는 이슬람교를 탄압했고, 이슬람교를 믿던 위구르족은 이 때문에 서쪽에서 준가르부를 정벌하러 온 청나라군을 도왔다.] 20세기 들어 마씨 군벌 통치기에는 티베트가 이 지역에 쳐들어왔다. 마씨 후이족 군대에게 격퇴당하기도 했다. 이른바 장회충돌(藏回冲突) 혹은 회장충돌이라 불린다. [[후이족]]과 [[티베트인]]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지만 칭하이성에서 상호 교류는 활발한 편이다. [[티베트 요리]]도 후이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티베트 불교에서는 도축을 권하지 않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이 도축과 육류 가공을 후이족에게 맡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후이족은 똑같은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던 [[만주족]]에게 탄압[* 후이족에게도 [[변발]]을 강요한 건 물론 모스크 정문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현판을 붙일 것을 강요했다.]당했던 역사 때문에 반불교 감정이 심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 티베트인에게 화풀이하는 성향이 있다. 티베트인들도 후이족이 배타적이라고 거부감을 느끼는 편으로 티베트인이 봉기하는 경우 한족뿐 아니라 후이족들도 표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티베트계 무슬림들의 경우 일반 티베트인과 후이족 양쪽에게 모두 배척당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양쪽의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칭하이성의 티베트계 무슬림들은 라싸 일대의 [[까체족]][* 티베트인과 [[카슈미르인]], 위구르인, [[라다크]]의 무슬림 등등의 혼혈]과 다르며 칭하이성과 간쑤성 경계 지대의 무슬림 소수민족 [[살라르족]]의 영향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