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라크 (문단 편집) === [[십자군 전쟁]]기 === [[파일:케라크1.jpg]] 1140년대 건설되어 울트레주르뎅의 중심이 된 케라크 성채 1147년 파간이 사망한 후 영주로 임명된 모리스는 성채 건설을 이어받아 완성하였고, 1161년 그가 사망하자 사위 필립 드 밀리가 계승하였다. 1168년 필립 드 밀리 역시 딸 에티에네트만을 남기고 사망하였고, 그녀는 옹프루아 3세와 밀레 드 플랑시와 연이어 결혼하였다. 하지만 남편들이 1173년, 1174년 연달아 사망하고 1170년과 1173년 [[장기 왕조]]가 케라크 성채를 포위[* 1170년 아이유브가 이집트의 아들 살라딘과 합류하러 남하하며 잠시 포위. 1171년에는 [[누르 앗 딘]]이 직접 포위 시도하나 살라딘이 주군인 그와 마주키길 두려워하며 몽레알 포위를 풀고 철수하며 무산됨. 그후 서면으로 겨우 해명. 1173년에는 부친 아이유브의 병을 핑계로 철수, 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나 곧 누르 앗 딘이 사망해버림]하는 등 위협을 받자 그녀는 전 [[안티오크]] 공작이자 [[장기 왕조]] 하에서 10여년간 포로로 지낸 후 석방된 [[르노 드 샤티용]]과 결혼하였다. 복수에 불타던 르노는 카라크의 입지를 활용하여 이집트, 시리아, [[히자즈]]를 오가는 무슬림 상단을 공격하였다. 이에 술탄 [[살라흐 앗 딘]]은 별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휴전이 성사된 후인 1181년 르노가 재차 무슬림 카라반을 습격하자 이듬해 카라크를 공격하였다. 국왕 [[보두앵 4세]]의 만류에도[* 1174년 [[아모리]]가 사망한 후 케라크의 밀레 드 플랑시가 사실상의 섭정에 오를만큼 울트레주르뎅 영주의 권위는 매우 높어져 있었던 상태였다] 르노는 [[아카바]]를 점령한 후 1183년 초엽 [[홍해]]를 따라 [[메카]] 근처 해안을 습격하였다. 비록 십자군 함대는 목표인 [[메디나]]와 메카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많은 무슬림 순례객들이 사망하였고 살라흐 앗 딘의 위세에 큰 타격이 되었다. 격노한 술탄은 1183년 11월 카라크를 포위하였는데, 당시 성채에서는 에티에네트의 아들 옹프루아 4세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라 간의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에티네에트가 적진에 음식을 보내자 살라흐 앗 딘은 결혼식장 구역은 공격하지 않는 미담을 남겼다. 다만 이듬달 [[보두앵 4세]]가 원군을 이끌고 오자 성채를 함락하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1184년 8월 살라흐 앗 딘과 동생 [[알 아딜]]은 재차 케라크 성채를 포위하였으나 이듬달 원군이 다가오자 [[나블루스]]와 [[제닌]]을 습격하고 철수하였다. 1185년 재차 휴전이 성사되었으나 이듬해 르노가 다시 무슬림 순례단을 학살하자, 분노한 술탄은 1187년 봄 출정하여 카라크 일대를 습격한 후 [[하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살라흐 앗 딘은 사로잡힌 [[르노]]를 처형하였고, 에티에네트는 아들 옹프루아 4세의 석방을 대가로 카라크와 몽레알 성채를 넘겨주었다. 성채의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였으나 고립된 상태였기에 1188년 11월 알 아딜에게 점령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